경덕왕(景德王)의 성은 김, 이름은 헌영(憲英), 시호는 경덕(景德)이다. 성덕왕의 아들이고 효성왕의 동생인데,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739년(효성왕 3)에 태자가 되었다가 742년에 효성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비인 삼모부인(三毛夫人)이 후사를 낳지 못하자 출궁시키고, 만월부인(滿月夫人)을 후비로 맞아 나중에 혜공왕이 되는 왕자 건운(乾運)을 낳았다.
경덕왕은 745년에 사정부(司正府), 소년감전(少年監典), 예궁전(穢宮典), 정찰(貞察), 동궁아관(東宮衙官) 등의 관부를 신설하였다. 이 가운데 사정부와 정찰은 신라 중대(中代)에 들어 급증한 관료군을 감찰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746년에는 궁내(宮內)의 관리를 감찰하기 위해 내사정전(內司正典)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국학(國學)에 박사와 조교를 두고 창부(倉部)와 조부(調府)에 사(史)를 늘려 설치하였으며, 천문박사와 누각박사, 율령박사 등을 새로 두는 등 관부 조직을 확충하였다.
재위 7년(748년)에 대동강 이남~예성강에 해당하는 패강(浿江) 지역에 대곡성(大谷城) 등의 군현을 설치하여, 성덕왕 때 영유하기 시작한 이곳의 통치를 본격화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관료에게 매달 주던 월봉(月俸)을 폐지하고 녹읍(祿邑)을 주는 것으로 급여제도를 바꾸었다. 689년(신문왕 9)에 녹읍을 폐지하고 '축년사조(逐年賜租)', 곧 해마다 곡물인 조(租)를 차등을 두어 내려주게 한 바 있다.
따라서 757년의 조치는 신문왕 9년에 폐지되었던 녹읍을 부활시킨 것을 의미한다. 이때 부활된 녹읍은 하대에 국학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에게 거노현(巨老縣: 지금의 경남 거제시)을 녹읍으로 설정해 주었듯이, 진골과 더불어 6두품 이하 신분의 관리들에게도 지급되었다고 보인다.
경덕왕의 개혁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관호(官號)와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꾼 것이다. 757년에 녹읍 부활과 더불어 지방의 군현명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영속(領屬) 관계를 개편하였다. 747년(경덕왕 6)에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中侍)를 시중(侍中)으로 개칭한 것을 시작으로 759년(경덕왕 18)에 대부분의 관직과 일부의 관부명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그 양상을 보면, 6전(典) 조직에 해당하는 관부를 제외한 나머지 관부의 이름을 세 글자로 통일하고, 한자 어휘를 사용하였다. 질서정연한 중국식 제도를 모범으로 하는 행정관료 중심의 정치체제를 추구하였다. 이 무렵 발해와 일본에서도 관제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치거나 당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중앙관제를 정비한 바 있다.
한편, 746년에 속인(俗人) 150명의 출가를 허락하였는데, 이러한 관도승(官度僧)은 신라에서 진흥왕 이래 중요한 불사(佛事)와 국왕의 치병, 사면 등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 행해졌으며, 국가가 불교 교단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676년 나당전쟁이 완료되었으나 8세기 초까지 대당 관계는 전쟁의 여파로 원활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에서 건국한 발해와도 외교 관계의 틀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였다. 양국 사이에 해빙이 이뤄진 것은 713년(성덕왕 12) 당나라 현종이 즉위하여 성덕왕을 다시 책봉하면서부터였다.
이로써 양국 관계는 정상화되었으나, 책봉호에 들어간 ‘계림주’에서 알 수 있듯이 당 황실은 여전히 신라를 자신의 통제권 안에 있는 번국(藩國)으로 여기고 있었다. 경덕왕은 당에 대해 거의 매년 새해를 축하하고 조공을 하기 위한 사절을 보내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과의 국가 교역도 활발해져 서역과 중국 남해에서 생산된 물품까지 당나라를 거쳐 신라로 유입되었다. 755년에 일어난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으로 당이 혼란에 빠지면서 신라의 대외 교역이 잠시 침체되었지만, 760년대 중엽 반란이 진정되고 동아시아 여러 나라 사이에 긴장이 완화되면서 신라의 교역망은 복원되었다.
성덕왕대에 신라와 당의 국교가 회복됨으로써 신라 외교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축소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신라와 일본 사이에 일련의 외교 분쟁이 일어났다. 그 배경에는 국제 정세가 변화함에 따라 신라가 일본에서의 외교 형식을 교정하려는 목적과 함께 국제 교역상의 이익을 얻으려는 경제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752년(경덕왕 11) 신라의 김태렴(金泰廉)이 이끈 대일 사절단은 일본 고위층과 교역을 벌였다. 종래 무상으로 공급하던 물품 가운데 외국산품과 고급 신라 제품은 유상으로 교역하도록 정책을 바꾼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반발하였고, 신라는 743년(경덕왕 2) 이후 9년 동안 사절단 파견을 중단하였다. 753년에 경덕왕은 일본 사절이 오만무례하다고 하여 접견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때 일본 사신은 오노노 아손 다모리〔小野朝臣田守〕 일행으로서, 752년에 일본을 방문한 김태렴 일행의 반례사(返禮使)로 파견되었다. 일련의 외교 마찰을 겪으면서 신라는 사절단이 일본에 체류할 때 대등한 국가의 외교 사절로서 대우받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나라에 대해서는 조공을 통해 사대(事大)하지만, 일본은 대등한 이웃 나라로 교섭하려는 것이 당시 신라 외교 정책의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