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은 동북아시아의 여러 부족과 정치체에서 지역의 수장 또는 족장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가장 강력한 간이 왕 또는 마립간이 되어 여러 간과 더불어 주요한 국정을 논의하여 결정하였다. 점차 국왕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간은 국왕으로부터 관등을 받고 신료로 편입되었다.
고대, 동북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과 정치체의 수장 또는 족장을 가리키던 호칭이다. 간은 지역에 따라서 다르게 불렀는데, 선비족과 같은 북방 유목민은 가한(可汗), 한(汗),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가(加), 신라에서는 간(干), 간지(干支), 가야(加耶)에서는 한기(旱岐) 등으로 불렀다. 백제는 뚜렷한 기록은 없으나 왕을 건길지(鞬吉支)라고 했다는 『주서(周書)』 백제전의 기록으로 보아, 길지가 간에 해당하는 칭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간은 해당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정치적 우두머리였으며, 유력한 정치체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정치체가 연합하면 그 가운데 핵심 정치체의 수장은 왕이 되었다. 이를 신라에서는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불렀는데 여러 간 중의 최고의 간이라는 뜻이다.
삼국시대 초기에 왕 또는 마립간이 출현하였으나 집권력이 약하였기 때문에 중앙의 유력한 정치체와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5부 및 6부는 국왕이 속한 정치체를 비롯하여 연합을 맺은 중앙의 핵심 정치체였고, 종래의 간은 소속 부의 장(長)이 되었다. 그밖의 지역에도 다양한 규모의 부족과 정치체들이 산재하였으며 그 우두머리들은 스스로를 ‘간’, '간지'라고 칭하였다.
간 또는 가로 불리던 부장들은 조상 대대로 거느리고 있던 혈족집단과 토지, 산림 등의 천연자원, 집단 종속민 등을 바탕으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거나 분쟁이 발생하여 판결을 내려야 할 때 국왕은 부장들을 소집하고, 이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이것이 제간회의(諸干會議) 또는 제가회의(諸家會議)라고 불리는 회의체였으며, 6세기 초의 신라 금석문(金石文)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501년 혹은 441년),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503년),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524년)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간은 청동기 이래 정치체의 우두머리였으며, 중앙의 부장급은 삼국시대 초기까지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와 세력을 갖고 있었으나 점차 국왕의 신료로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