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관등 중 하나인 외위(外位)는 왕경(王京) 출신 관료들에게 주어진 경위(京位)와 달리 지방민에게 내린 관등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0 잡지9 직관지(하) 외위조에 의하면, 674년(문무왕 14)에 처음 만들어졌고, 전체 10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6세기 초 이후 신라의 금석문에서 외위의 존재가 확인된다.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한 520년(법흥왕 7) 즈음에 외위가 성립하였으며, 삼국통일 직후인 674년에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외위와 경위를 비교함에 있어 경위 15등인 대오(大烏)에 해당하는 외위 일척(一尺)이 생략된 것으로 보이므로, 일반적으로 외위는 11등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금지(壹金智)나 급벌척(及伐尺) 등과 같이 직관지에 없는 외위가 비문이나 목간 등에서 확인되고 있어서, 원래는 더 많은 등급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외위는 이름이 ‘간’으로 끝나는 1~7등의 간군과 일벌(一伐) 이하 비간군으로 구분된다. 이는 제7등 간을 포함한 간군는 전통적 수장의 위호(位號)인 ‘간지(干支)’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가야 지역의 수장 칭호인 ‘간지’는 ‘간기(干岐)’ 혹은 ‘한기(旱支)’, ‘한기(旱岐)’라고도 썼는데, 부여와 고구려의 수장 칭호인 ‘ 가(加)’와도 통하며, 유목 사회에서 수장을 의미하는 ‘가한(可汗, Khan/Han)’과 동일한 용어이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501 혹은 441),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503),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524),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550 또는 551),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561) 등에 기록된 신라의 관등을 살펴보면, 503년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까지 ‘간지’는 신라 6부 중 탁부(喙部)와 사탁부(沙喙部)를 제외한 4부의 부장과 지역 집단의 수장인 촌주 등의 위호로 사용되었다.
신라에서 4부의 부장과 지방 촌주의 지위는 차이가 매우 컸지만 모두 ‘간지’ 위호를 사용한 것은, ‘간지’가 독자적 정치체의 수장 칭호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보면, 4부의 부장은 여전히 ‘간지’라고 칭하지만, 촌주들은 ‘하간지’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둘의 지위 차이를 반영하는 호칭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율령 반포 이후 지방 세력을 직접 지배해 나가는 과정에서 외위를 마련하고, 전통적 수장 칭호인 간지를 하간지로 고쳐서 외위로 삼은 것이다. ‘간지’에서 유래한 외위는 신라에 복속한 지방 세력 가운데 지배자급, 곧 수장층에게 준 것이고, 그 아래 비간군 외위를 따로 두어 구분하여 서열화하였다.
이후 복속된 지방 유력자의 세력 정도와 공 등을 고려하여 ‘하간지’ 위에 상위 외위를 추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간지 위에 상간지를 둔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간군 외위를 증설하여 결국 제1등 악간(嶽干)에서 제7등 간에 이르는 간군 외위가 완성되었다.
한편 그 과정에서 간군 경위와 마찬가지로 ‘간지’에서 ‘지’가 생략되어 ‘간’으로 썼고, 또 제7등에 ‘하’가 빠져 ‘간’으로만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름의 변화 모습은 경위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다만 경위의 경우 ‘간지→간→척간→찬(湌)’으로 접미사가 변화하였는데, 외위는 그러지 않아 차이가 있다.
삼국통일 이후 복속한 백제와 고구려 지배층에게 경위를 내려 주하면서 외위는 점차 의미를 상실하고, 674년 즈음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등으로서의 ‘간’ 역시 사라지지만, 관직명으로서의 ‘간’은 남아 있었다. 다만 관직명으로서의 ‘간’은 외위 ‘간’과는 다른 기원을 가진 이름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