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통일신라시대의 관등 혹은 관직.
내용
이들 본기 기사의 원문은 “수위남변제일(授位南邊第一)”인데, 보통 이를 “남변제일이라는 위를 주었다.”라고 해석하여, 남변제일을 어떠한 지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직이나 관등(官等)으로 볼 수 있는데, 귀하거나 상서로운 물품을 바친 인물에게 수여된 것이어서 관직보다는 관등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지위인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권 40 잡지 9 직관지(하)에 “여러 전기에 보이지만 그 설치 연혁과 지위의 고하를 알 수 없는 것[其官銜見於傳記而未詳其設官之始及位之高下者]” 중 하나로 남변제일이 적혀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남변제일이 무슨 지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위와 같이 해석하여 하나의 관등으로 파악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남변제일을 신라 관등 가운데 하나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일신라에서는 이전과 달리 지방민에게도 경위를 수여하였는데, 상한이 있었다. 856년(문성왕 18)에 쓰인 「규흥사종명(竅興寺鐘銘)」에 상촌주(上村主)가 삼중사간(三重沙干), 제2촌주(第二村主)가 사간(沙干)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지방민들이 수여받을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이 8등 사찬(沙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찬이 남변에서 받을 수 있는 제1관등인 것이다.
하지만 남변제일의 지위를 받은 사람 중 효소왕 대의 미힐은 신촌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지방인이 분명하지만, 경덕왕 대의 대영랑은 이름으로 보아 화랑으로 추정되며 왕경인일 수 있다. 따라서 대영랑에게 지방민에게 수여하던 최고 관등을 주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아 단정하기는 힘들다.
한편 남변제일을 어떤 구체적인 직위가 아니라 일반적인 호칭으로 볼 여지도 있다. 즉 실질적인 지위와 무관한 ‘남쪽 지역의 제일’이라는 명예적인 칭호일 수 있다. 최근에는 “(관)위와 남변제일(이라는 칭호)을 주었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는 ‘위’와 ‘남변제일’을 별개로 보는 것이다.
또 ‘위’와 ‘남변제일’은 무관하다고 볼 수 있는 다른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남변제일’은 ‘남변에 있는 집 한 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새로운 해석의 여지도 있으므로 기존의 통설에서 벗어나,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참고문헌
원전
- 『삼국사기(三國史記)』
논문
- 전덕재, 「『삼국사기』 직관지의 원전과 편찬: 외관과 패강진전, 외위, 미상관제 기록을 중심으로」(『역사문화연구』 70,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9; 『삼국사기 잡지 · 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2021)
- 김희만, 「『삼국사기』 직관지 미상조와 편찬자의 역사인식」(『신라문화』 49,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7)
- 권덕영, 「《삼국사기》 신라본기 역주 후기」(『신라사학보』 27, 신라사학회, 201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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