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에 수취를 위하여 작성된 장부인 「 신라촌락문서」에 나오는 전답의 종류 가운데 하나이다. 사해점촌(沙害漸村), 살하지촌(薩下知村), 미상촌, 서원경(西原京) 미상촌이라는 4개 촌의 경제 상황을 기재한 「신라촌락문서」에는 촌별로 있는 농지를 전(田)과 답(畓), 마전(麻田)으로 나누어 그 면적의 합계가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전과 답은 다시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과 촌관모전답(村官謨田畓)으로 구분하여 면적을 집계하였다. 또한 사해점촌에는 내시령답(內視令畓)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연수유전답은 백성들이 소유한 사유지로 이해되고, 연수유전답과 별도의 지목으로 기재된 촌관모전답과 내시령답은 국유지나 공유지로 이해된다. 내시령답은 관직으로 추정되는 내시령을 이름으로 가지고 있어서, 관인에게 지급된 관료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촌관모전답은 촌관모를 관직으로 보기 힘들어 내시령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어떠한 성격의 전답이었는지는 다른 기록이 없기에 알 수는 없다. 이름인 ‘관모전답’의 한자 뜻을 풀이하여 보면 ‘관이 계획한 전답’ 혹은 ‘관에 계획된 전답’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청에서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목적의 전답, 곧 후대의 공해전(公廨田)과 같은 성격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을 가지고 그 성격을 확실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현재 관모전답은 「신라촌락문서」에만 나온다. 따라서 「신라촌락문서」에서 확인되는 양상을 보고 그 성격에 대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촌관모답은 4개 촌에 모두 있다. 사해점촌에 4결, 살하지촌에 3결 66부 7속, 미상촌에 3결, 서원경 미상촌에 3결 20부가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촌관모전의 경우 서원경 미상촌에만 있으며 면적은 1결이다.
모든 촌에 예외없이 촌관모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또 각 촌별로 면적이 모두 다름을 알 수 있다. 각 촌에 모두 3~4결 정도의 관모전답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수치가 약간씩 다르다. 이는 촌마다 일정한 면적의 관모전답이 있었던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하여 각 촌의 전답 전체 면적은 전 2결을 답 1결로 환산하여 합산하였는데, 전체 면적을 기준으로 1결당 3부(3%) 정도를 관모전답으로 설치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각 촌별로 관모전답의 규모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약간씩 차이가 나는 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가설이다.
다만 서원경 미상촌의 경우 1결당 5.5부 정도로 그 비율이 맞지 않는다. 미상촌이 5소경 가운데 하나인 서원경에 속하여 있는 특수한 곳이어서 일반적인 촌보다 넓은 면적의 촌관모전답을 설정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촌에 일괄적으로 일정한 비율의 촌관모전답을 설치하였다고 확정하기는 어렵다.
한편 촌관모전답은 내시령답과 같이 연수유전답과 구분되어 있다. 이는 백성들이 소유한 토지 가운데 일부를 촌관모전답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촌관모전답은 국유지나 공유지로 이해할 수 있다. 국유지인 촌관모전답이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존 연구들에서는 국유지에 설정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내시령답과 같이 촌관모전답도 관료전과 같은 방식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역역[^2을] 동원하여 경작이 이루어졌거나, 전호(佃戶)들에게 경작을 맡기고 수확물의 일부를 받는 방식이 그것이다. 전자는 수확물 전체가 관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고, 후자는 반이 관의 소유가 되는 방식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 촌민들이 공동으로 경작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어떤 방식이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근래에 촌관모전답의 운영 방식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해석에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 포항 중성리 신라비」에 중앙 유력자 혹은 6부 소유의 농지 경작에 해당 지역의 촌민들이 작민(作民)으로 동원된 듯한 기록이 보여, 당시에 농지 인근에 있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경작하는 방식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확인된다.
또 나주복암리고분군(羅州伏巖里古墳群) 주변 유적에서 발굴된 백제 「나주 복암리 목간 5호」를 공유지 경작에 동원된 사람들의 명부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 역시 주민들을 동원한 경작 방식이 제도화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이들 자료는 「신라촌락문서」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서 촌관모전답 이해에 활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당시 농업 경영 방식과 국유지 운영 방식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관모전답은 「신라촌락문서」에서만 확인되는 용어여서,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지금으로서는 관청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국유지에 설정된 농지라는 것 이상의 내용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또 관모전답에서 ‘관’이 어떤 관청인지도 불분명하다.
「신라촌락문서」에서 확인되는 촌관모전답 이외의 관모전답이 확인된 바 없다. 이 때문에 촌관모전답의 ‘관’을, 촌의 행정 업무와 관련 있는 관청으로 짐작하는 견해도 있고, 여러 관청을 포괄하는 ‘국가’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전자는 특정 관청에 지급된 전답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여러 지역에 설치되어 국가에 수확물을 납부하는 국유지라고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