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복암리 고분군은 전라남도 나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굴식돌방무덤·돌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4기가 남아 있다. 고분군은 영산강이 흐르는 다시벌에 ‘ㄴ’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목할 점은 3호분에서 3세기 옹관부터 7세기 사비백제기 석실분까지 동일 집단이 만든 여러 묘제가 나온 것이다. 이 집단이 백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도 토착문화와 그 위상을 그대로 유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규두대도(圭頭大刀) 등 일본 관련 유물이 나왔고, 영산강 유역의 묘제의 변천과 조영 방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은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1998년 2월 20일에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영산강의 지류에 형성된 하천평야의 낮은 구릉상에 4기가 분포되어 있다. 북으로는 멀리 백룡산(白龍山, 345m)과 신걸산(信傑山, 368m)이 위치하며, 동서로는 거마산(擧馬山, 170m)과 청림산(靑林山, 187m)이 가까이 둘러싸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는, 넓은 다시벌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고분이 위치한 곳은 신걸산 줄기를 이은 거마산 자락에 위치한 시랑골(낭동)의 바로 서쪽이다. 복암리 고분군은 현재 4기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주변에 2∼3기가 더 있어 ‘칠조산(七造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나머지는 일제시대의 경지정리로 소멸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4기의 고분은 역 ‘ㄴ’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3호분은 2호분에서 남쪽으로 26m, 4호분에서 동쪽으로 16m의 거리를 두고 있다. 3호분은 1996년부터 1999년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와 전남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고분으로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유적이다.
복암리 고분군은 문평천 유역에 해당하지만 삼포강 유역의 고분 변천과 궤를 같이 하면서 가장 늦은 시기까지 남아 있었던 고분군에 해당한다. 1·2호분은 정비복원을 위한 기초조사가 실시되었고, 3호분은 전면적으로 발굴조사 되었다. 조사 결과 1호분은 추정 직경 18m, 높이 4.5m의 원형분으로 확인되었는데 분구 주위를 폭 6m 정도의 주구(周溝)가 감싸고 있다. 주구에서는 상당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4군데의 집중부를 이루고 있었으며 상호간에는 5∼10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분구에서는 성토 분구를 되파서 묘광(墓壙)을 만들고 축조한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가 도굴된 채 노출되었는데 현실, 전실, 널길[연도(羨道)] · 묘도로 구성되어 있다. 판석을 이용한 단면 사각형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으로 전장 8.6m, 현실 길이 2.53∼2.6m, 너비 1.4∼1.46m, 높이 1.2m이다. 현실과 전실은 도굴되었지만 현실에 돌베개[石枕]가 남아 있었다. 널길은 원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대호(大壺) 2점, 녹유탁잔(綠釉托盞) 1조, 유개소호(有蓋小壺) 7조, 평저소호(平底小壺) 1점, 소병(小甁) 1점 등이 비교적 정연하게 출토되었다.
2호분 주위에서는 평면 사다리꼴의 구조가 조사되었는데 내부에 원통형 토기를 비롯한 각종 토기가 다량으로 노출되었으며 말뼈와 소뼈가 확인되었다. 분구의 현존 상태와 주구의 평면형태 및 토층상으로 보아 2호분은 사다리꼴 고분으로 초축(初築)된 후 긴사다리꼴 고분으로 수평확장되고 마지막으로 현재의 분구와 같이 평면 장방형의 방대형(方臺形)고분으로 수직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1·2호분 사이에서는 사다리꼴의 선행분구와 이른 형태의 독무덤[甕棺墓] 7기가 확인되었다.
3호분에서는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돌방[石室] · 돌덧널무덤[石槨墓], 독무덤, 널무덤[木棺墓] 등 7가지 형태의 묘제 41기가 확인되었다. 분구는 방대형이고 규모는 동서 중앙 36m, 동서 최대폭(분구 남편)이 38m, 남북 중앙 37m, 남북 최대폭(서편) 42m로 나주 대안리 9호분(44.3×34.94m)에 버금가는 규모이다. 구지표에서부터 성토된 높이는 분정(墳頂) 서남부분이 6.0m이다. 중앙 평탄지는 400㎡ 정도로 넓은편으로 돌이 1∼2겹 깔려 있었다. 분구의 주변에는 주구가 돌려져 있었으나 경작으로 유실되었고, 방대형 분구 이전의 선행분구 주구만이 남아 있다.
단일 분구에서 독무덤[甕棺墓] 22기, 구덩식 고분인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3기, 굴식 고분인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 11기, 앞트기식 고분인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 1기,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2기, 돌덧널독무덤[石槨甕棺墓] 1기, 나무널무덤[木棺墓] 1기 등 영산강유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묘제 총 41기의 매장시설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영산강유역의 다장(多葬) · 복합묘적(複合墓的)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그 중 1996년도 조사 석실은 영산강유역의 토착묘제인 대형 독널[옹관(甕棺)]이 4기 매납된 초기의 굴식돌방무덤으로 금동신발, 마구류 등이 출토되어 옹관고분을 조영하던 집단이 돌방무덤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 분구 내에서 비교적 선후 관계가 분명한 각양각색의 묘제를 확인함으로써 이지역 묘제의 변천과정을 심도 있게 논의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얻은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다장 · 복합묘로서의 중요성 이외에도 주구와 분구(墳丘)의 토층조사를 통하여 돌방무덤이 주로 쓰인 현재의 방대형분구(方臺形墳丘) 조영 이전에 독무덤을 매장주체로 하는 2∼3기의 선행분구가 존재함을 알게 되어 영산강유역의 대형분구묘 조영방법 및 성격을 해명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다.
방대형분구의 조영과정과 층위관계 등으로 살펴본 복암리 3호분은 3단계로 크게 나뉜다. 현 분구 조영 이전의 선행기인 독무덤 전용기, 96돌방무덤 등이 만들어진 방대형분구 조영기, 그리고 조영 이후 성토층을 되파고 만든 돌방무덤 성행기로 분기가 되는데, 전용독널 발생기인 3세기의 독널부터 7세기의 사비백제기 돌방무덤까지 동일 집단에 의해 조영되고 있어 각 단계별로 이 지역 집단의 성격이 주변 집단 또는 외부의 힘에 적응하면서 변화해 온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복암리 3호분 조영집단은 백제의 성장 및 지방지배의 확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지만 토착적인 문화 및 이 지역에서의 지배집단으로서의 위상은 끝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6세기 중 · 후엽 이후로 백제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규두대도(圭頭大刀) 등의 유물은 일본열도와의 관계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다원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금동신발, 은제 관식, 장식대도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어 3호분 축조집단 자체의 성격뿐만 아니라 백제, 일본과의 관계 규명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특히 석실묘에서 출토된 규두대도 및 귀면문삼환대도(鬼面文三環頭大刀)는 일본에서도 드문 예로 중앙정부의 지방지배확대라는 문제와 더불어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하나의 무대로 한 역사전개과정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4호분은 방형계로 분구의 규모는 남북 최대길이 31.5m, 동서 최대너비 23m, 최고높이 3.15m로 남아 있는데 변형된 모습이다. 분정(墳頂)에서는 토기조각과 독널조각이 보이며, 분구 북쪽의 함몰부에서는 돌방부재가 보이고 있어 독널과 돌방이 함께 조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복암리 고분군의 인근에는 회진토성이 알려져 왔지만 시기적으로 영산강유역의 대형 고분군과 직결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