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에는 농민들에게 조용조(租庸調)와 군역을 수취하기 위하여 「 신라촌락문서」를 작성하였다. 그런데 「신라촌락문서」에 기재된 농지의 종류 가운데 하나가 내시령답(內視令畓)이다.
「신라촌락문서」에는 서원경(西原京, 지금의 충청북고 청주)에 근접한 군(郡)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해점촌(沙害漸村), 살하지촌(薩下知村), 이름을 알 수 없는 미상촌(未詳村)과 서원경이 직접 관할하던 미상촌 등 4개 촌의 경제 상황을 기재하고 있는데, 촌별로 소재한 농지를 밭[전(田)], 논[답(畓)], 삼밭[마전(麻田)]으로 구분하여 각각 면적의 합계가 적혀 있다. 그리고 논과 밭은 다시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과 촌관모전답(村官謨田畓)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면적을 적고 있다.
그런데 사해점촌의 경우 또 별도로 내시령답(內視令畓) 4결이 기재되어 있다. 나머지 3개 촌에서는 내시령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미상촌에는 경제수목 중 잣나무[백자목(栢子木)]의 숫자 42 아래 "모두 전내시령 때에 심었다[並前內視令節植內之]."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또 문서의 마지막에 "전내시령 때에 심은 것 중에 죽었다고 보고된 잣나무가 13그루[前內視令節植內是而死白栢子木十三]"라는 기록도 있다.
내시령답은 그 이름을 볼 때, 내시령이 소유한 답이거나 내시령이 지급받은 답이라고 볼 수 있다. 내시령답의 성격은 내시령이 어떤 존재이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내시령은 오직 「신라촌락문서」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이름이다. 이에 여러 연구자들이 제각기 그 실체에 관하여 다양한 설을 제시하여 왔다.
일단 내시령이 신라의 관청과 관직을 정리한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확인되지 않는 점에 대하여, 정식의 관명이 아니라 별칭이나 이칭으로 보거나, 직관지에 기재되지 못할 정도로 중요하지 않거나 고위 관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내시령을 다른 관직의 이칭 혹은 별칭으로 보는 입장은 주로 왕실과 궁궐 관련 사무를 총괄하는 내성(內省)의 관인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내시령의 ‘내’를 왕궁과 연결시키고 내성을 의미한다고 보는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주로 장관 등 고위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성의 장관은 사신(私臣) 혹은 전중령(殿中令)으로 명시되어 있어서, 내시령을 내성의 장관으로 보기에는 주저된다. 또 내시령답을 내성의 장관이 소유하거나 그에게 지급된 토지로 보기에는 면적이 4결에 불과하다는 문제도 있다.
이 때문에 다른 촌에도 내시령답이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신라촌락문서」를 볼 때, 내시령답이 여러 곳에 있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더하여 미상촌에서는 잣나무를 심는 일과 관련하여 전내시령이 등장하는데, 내성 장관이 잣나무와 관련하여 기재된 것도 어색하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내시령을 내성의 관인으로 보더라도 중요하거나 고위직이라고 보지 않는 입장이 있는데, 조(租)와 조(調)의 수취 또는 조(調)의 생산과 운반을 위하여 내성에서 파견된 하급 관리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칭이나 별칭으로 보는 견해 중에는 외사정(外司正)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다. 이들은 ‘내’를 내성과 무관하게 담당하는 ‘관내(管內)’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내성과 마찬가지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하지 못하다.
그 외에 지방관인 군수(郡守)나 서원경 사신(仕臣)으로 보는 견해, 촌의 바로 상위 기관인 현(縣)의 관리, 집사부에서 임명하여 촌에 파견하고 지방관들의 지휘를 받아서 수취 업무를 담당하였던 하급 관리로 보는 견해, 우마(牛馬) 등의 관리를 담당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로 파악하는 견해 등이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내시령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제기되어 있다. 하지만 어느 견해들도 그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시령이 「신라촌락문서」에만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라촌락문서」의 정보를 통해 유추해 볼 때 고위 관직으로 보기 힘들며, 잣나무와 관련하여 기재되어 있어 권농과 관련된 역할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또 「신라촌락문서」가 수취와 관련하여 작성된 장부이므로, 수취 관련 업무와도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내시령은 지방 행정과 관련하여 파견된 관직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내시령의 성격을 이렇게 파악할 때, 내시령답은 관인에게 지급된 관료전(官僚田)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내시령답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8 신라본기 8 신문왕 7년(687) 5월조 기사에 있는 ‘문무관료전(文武官僚田)’의 실제 사례이다. 이 한 사례로 신라 관료전의 면모를 밝힐 수는 없겠지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우선 내시령답이 촌관모답(村官謨畓)과 함께 민들의 소유지인 연수유답(烟受有畓)과 구분되어 있음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이는 내시령답이 국유지나 공유지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료전은 민들이 소유한 토지에 설정하여 관리가 일정한 경제적 이익을 취할 수 있게 하는 제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내시령답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촌주위답(村主位畓)이 연수유답에 포함되는 것을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관료전은 국유지나 공유지 중에서 관리에게 지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시령답이 결수로 표시된 점은, 고을 단위로 지급되던 녹읍과 달리 일정한 면적 단위로 지급되었음을 알려준다. 결수를 단위로 지급되었을 것인데 이는 관료전에서 일정한 경제적 이익만을 얻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고을 안에서 인적 ‧ 물적 단위의 지배권이 있던 녹읍과 달리 인적 지배권은 배제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단서를 주기도 하였다. 국유지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수조권(收租權)를 주는 방식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가 역역 동원 차원에서 경작 인력을 지원하거나, 촌민들이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하고 그 수확물을 취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빌려주어 경작하게 하고 수확물을 일정한 비율로 받았을 수도 있다.
한편 내시령답이 4결에 불과하여 촌 전체 전답의 면적과 비교할 때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다. 촌관모답과 동일한 면적인데, 촌관모답이 촌 소재 전체 전답 면적의 3% 정도라는 연구가 있다. 내시령이 하급 관리라는 견해가 대체로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편이고 다른 사례를 확인할 수 없어서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관료전이 대규모 농지를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