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문왕 ()

고대사
제도
삼국시대, 신라에서 왕의 근친에게 사용하던 왕호.
제도/관직
설치 시기
삼국시대 신라 상대
폐지 시기
삼국시대 신라 중대
소속
신라의 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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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갈문왕(葛文王)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왕의 근친에게 사용하던 왕호이다. 상고기에는 상당한 정치적 실권과 위상을 가지고 국정 운영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지만,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역할과 위상이 축소되었고, 결국 신라 중대 이후 사라졌다.

키워드
정의
삼국시대, 신라에서 왕의 근친에게 사용하던 왕호.
내용

갈문왕(葛文王)은 신라 상대(上代)에 사용된 왕호의 일종으로, 그 어의(語義)와 유래를 알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1 신라본기 1 일성이사금 15년(148)조 기사에 갈문왕에 대한 『삼국사기』 편자의 주석이 나오는데, “신라에서는 죽은 후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포항 냉수리 신라비를 비롯하여 6세기에 만들어진 신라의 각종 비석이나 울주 천전리 각석 등과 같은 각석(刻石)에는 갈문왕이 사후에 추봉된 것이 아니라 생전에 책봉되어 활동한 것으로 드러나 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는 ‘매금왕(寐錦王)’이라 칭하던 왕과는 엄연히 구별되지만, 왕에 버금가는 특수한 지위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 편자의 주석이 실제와 다른 부분이 확인되었으며, 갈문왕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게 되었다.

갈문왕에 대한 초기 연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갈문왕들을 분석하여 성격과 변천을 고찰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갈문왕을 이해하는 기본 틀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크게 세 유형의 왕족들이 갈문왕이 되었다. 첫째는 왕비의 아버지나 왕의 외할아버지이고, 둘째는 왕의 아버지이지만 왕이 아니었던 인물이며, 마지막은 왕의 동생이다.

왕비의 아버지로는 일지갈문왕, 허루갈문왕, 마제갈문왕, 지소례갈문왕, 박아도갈문왕, 습보갈문왕, 복승갈문왕 등을 들 수 있다. 왕의 아버지로는 세신갈문왕, 구도갈문왕 등을 들 수 있으며, 왕의 외할아버지로는 이칠갈문왕, 내음갈문왕 등을 들 수 있다. 왕의 동생으로는 기보갈문왕을, 여왕의 경우로는 선덕여왕의 배우자인 음갈문왕을 들 수 있다.

갈문왕의 변천 과정

이 세 가지 유형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대체로 박씨왕 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석씨왕 시대에는 왕의 아버지나 외할아버지가, 그리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된 이후부터는 왕의 동생이 주로 갈문왕이 되었다.

왕비의 아버지나 왕의 외할아버지가 갈문왕이 된 경우는 이사금을 왕호로 사용하던 3대 유리왕 대부터 16대 흘해왕 대로 보인다. 신라의 국가 체제가 독자적 정치체인 부들의 연합체의 성격이 강하였고, 또 왕권이 강하지 않았던 까닭에, 왕실과 혼인을 통해 유대를 강화한 유력 집단의 수장이 갈문왕으로서 왕과 함께 국정을 이끌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갈문왕은 왕위 계승권은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제17대 왕인 내물마립간 시기부터 김씨가 왕위를 세습하게 되고, 그와 더불어 왕권이 점차 강화되었다. 6부는 왕과 왕이 소속된 부를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재편되었다. 각 부의 독자성은 점차 약화되었고, 다른 부에 대한 왕권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김씨 왕실의 특정 가계에서 갈문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관행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 6세기 초의 금석문(金石文을 보면, 국왕을 가리키는 ‘매금(寐錦)’은 6부 중 ‘탁부(喙部)’ 소속이고, 아우인 갈문왕은 ‘사탁부(沙喙部)’ 소속이다.

눌지마립간의 아우 ‘ 복호(卜好)’의 손자인 ‘ 지증왕]’과 그의 아들 ‘ 입종갈문왕)’이 ‘사탁부’ 출신이다. 눌지마립간 대부터 갈문왕 자리는 ‘복호-습보-지증-입종’으로 이어지는 김씨 왕실의 특정 가계에 세습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갈문왕의 영향력 약화의 배경

마립간 시기에 김씨 왕실 중 눌지계와 복호계가 각각 ‘탁부’의 매금왕과 ‘사탁부’의 갈문왕 자리를 차지하면서 국정 운영을 주도하였다. 탁부와 사탁부가 다른 부를 압도하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6부의 연합체적 성격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 시기에 갈문왕은 신라 왕의 정치적 파트너라는 성격은 유지하였지만, 다른 부 혹은 다른 성씨 왕실의 유력자는 아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 지증왕과 같이 왕위 계승도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자성이 강한 6부 연합체적 단계에 비해, 그 정치적 실권과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을 것이다.

중고기에 들어서 6부 체제가 해체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지배체제가 구축되면서, 갈문왕의 정치적 위상이 하락하고 역할도 점차 축소되었다. 대신 법흥왕 대에 신설된 상대등(上大等)이 귀족회의의 수장으로서 왕을 보좌하면서 국정을 이끌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갈문왕은 왕에 버금가는 최고 지위의 소유자로는 인식되었지만 정치적 실권에서는 점차 멀어져 갔다. 그러한 추세는 중대 이후 유교적 왕자관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더욱 굳어진 듯하다.

갈문왕의 위상과 호칭의 대체

중대 이후 갈문왕이라는 호칭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실권을 가진 권력자로서의 위상이 완전히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왕이 아니었던 왕의 아버지가 가진 위호(位號)로도 사용되지 않았다. 아마 추봉 대왕이 갈문왕의 위상과 칭호를 대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9세기 전반 희강왕의 장인이자 민애왕의 아버지였던 김충공(金忠恭) 이후 갈문왕이라고 칭하는 인물이 사료에 나타나지 않고, 이후 다시 갈문왕이란 호칭이 등장하지 않는 점에서 이는 분명해진다.

갈문왕은 독자적인 6부의 연합체적 성격으로 출발한 신라의 국가 체제에 따른 정치 형태와 관련이 있는 왕호였다. 신라가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성격이 변화하고 끝내는 사라졌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역주 한국고대금석문Ⅱ』(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단행본

전덕재, 『신라육부체제연구』(일조각, 1996)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일조각, 1974)

논문

박수진, 「신라 갈문왕호의 성립배경에 대한 연구」(『선사와 고대』 57, 한국고대학회, 2018)
양자량, 「6세기 초 갈문왕의 지위변화」(『인문과학연구』 26,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윤진석, 「5~6세기 신라의 정치운영과 갈문왕」(계명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선석열, 「사로국의 지배구조와 갈문왕」(『역사와 경계』 80, 부산경남사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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