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냉수리 신라비 ( )

포항 냉수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
고대사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신광면사무소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비.
이칭
이칭
냉수리비, 냉수리신라비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보(1991년 03월 15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토성길37번길 13 (신광면, 신광면사무소, 신광보건지소)
정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신광면사무소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비.
개설

199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건립 연대는 계미년(癸未年)이라는 간지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는 인명으로 볼 때 443년(눌지마립간 27) 또는 503년(지증왕 4)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의 재산 상속 문제를 기록해놓은 것으로, 공문서(公文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내용

1989년 3월 말, 이곳에 사는 주민 이상운(李相雲)이 자기 소유의 밭에서 발견하여 4월 11일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학술적인 조사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비는 발견자의 조부 대(代)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고 하므로 정확한 원래 위치는 알 수 없다. 1989년 9월 현재 영일군 신광면 면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다.

영일 지역은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였으며 한동안 왜(倭)·고구려(高句麗)의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던 곳인데 신광면은 안강(安康)·청하(淸河)·흥해(興海)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특히 비가 발견된 냉수리는 곡강천과 형산강 지류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곳으로 부근 흥곡리에는 군내 최대의 고분군이 있고 ‘진율예백장(晋率濊伯長)’ 동인(銅印)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된다.

이 비는 자연석 화강암의 전면·후면·상면에 글자를 새긴 삼면비(三面碑)이다. 전면은 면을 다듬었으나 후면과 상면은 다듬지 않은 채로 글자를 새겼다. 형태는 전면 하변 너비 73㎝, 좌변 높이 47㎝, 우변 높이 66㎝, 두께 30㎝의 부정형 4각형이며 밑부분이 넓고 위로 올라가면서 너비가 축소되었다.

비문은 전면에 12행 152자, 후면에 7행 59자, 상면에 5행 20자로 총 231자가 새겨져 있고 음각을 하였다. 서체는 해서체(楷書體)로 보이나, 예서체(隸書體)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와 매우 비슷하다. 글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아 전면의 가장 큰 글자는 길이와 너비가 각 5㎝이고, 가장 작은 글자는 1∼3㎝이며, 후면과 상면의 큰 글자의 경우도 5∼7㎝ 정도이다. 비문은 크게 4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자가 파손된 곳이나 마모되어 읽을 수 없는 부분은 별로 없으므로 판독에 큰 문제는 없는 듯하다. 다만 후면 제1행의 제7, 8자의 경우 글자가 불분명하여 판독상에 이견이 있고, 같은 후면 제6행의 제7, 8자도 판독하기 매우 힘든 글자이며 이 이외에도 판독상의 문제가 되는 글자들이 있다.

첫째 문단은 전면의 제1행에서 2행까지로서,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이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를 인정해준 것이 주된 내용이다. 여기서는 사부지왕과 내지왕이 누구인가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둘째 문단은 전면의 제3행에서 후면의 제1행까지로서,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이하 중앙의 6부(六部)출신의 고위관리 7명이 계미년 이전에 있었던 두 왕의 결정 사항을 재확인하면서 절거리가 죽은 뒤 제아사노(弟兒斯奴)가 재산을 상속할 것과 말추(末鄒)·사신지(斯申支)는 이 재산에 관여하지 말 것을 결정한 내용이다.

셋째 문단은 후면 2행에서 마지막 행인 제7행까지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전사인(典事人) 7명이 앞의 고위 관리 7명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면서 소를 죽여 제의(祭儀)를 지내고 이를 포고한 것을 기록하였다.

넷째 문단은 상면 제1행에서 마지막 행인 제5행까지로 촌주(村主) 2명이 비의 건립 등의 일을 마친 것을 기록하였다.

특징

냉수리 신라비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항들을 담고 있다. 첫째, 지증왕이 왕이 되기 전에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고 그가 속해 있었던 부가 사탁부(沙啄部)였다는 점, 둘째, 지도로갈문왕 이하 6부 출신의 고위 관리 7명을 7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 셋째, 신라의 국호로서의 사라(斯羅)라는 명칭과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으로 비정되는 내지왕이라는 인물과 신라 6부 중 습비부(習比部)에 비정될 수 있는 사피(斯彼)라는 부의 이름이 이 비에서 최초로 보이고 있다는 점, 넷째, 전사인 7명이 6부 출신이면서 1명을 제외하고서는 관등 표기가 없다는 점, 또한 냉수리비를 제외한 이후의 6세기 금석문에서는 다수의 귀족관료들을 열거할 때에는 동일한 직명을 소지하였을 경우 관등(官等)의 높고 낮음이 기준이 되어 기재하는 것이 거의 예외 없이 지켜진 하나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비에는 관등의 고하(高下)가 아니라 부(部)를 중심으로 인명을 나열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 정치운용에서 부가 하나의 단위 정치 집단으로 기능하고 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정치가 운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중앙의 고위 관리 가운데 본피부(本彼部)와 사피부 출신자의 관등과 촌주의 관등이 ‘·간지(干支)’로 나오고 있다는 점,

여섯째, 이 시기 개인의 재산 소유와 상속에 관한 사항 및 재산 분쟁 때 이를 해결하는 절차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

일곱째, 촌주와 도사(道使) 등의 지방관직명이 나와 지방 통치 조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는 점 등이다. 종래에는 도사 등 행정촌에 파견되는 지방관이 6세기 초 군주제 시행 이후 또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두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비의 발견으로 신라 지방제의 기원을 훨씬 소급되게 되었다. 그러나 5세기대에서 지방제의 시원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당시 아직 신라의 전체 영역에 대해서까지 직접적인 지배를 실현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왕도와 가까운 인접지역에만 한정하여 지방관을 파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6세기에 들어와 지증왕(智證王), 법흥왕대(法興王代)를 거치면서 전국에 걸쳐 점차적으로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냉수리비에서 재(財)를 가운데 놓고 재지세력 사이의 분쟁을 이용하여 그들 가운데 중앙에 좀 더 충성심을 보여 지방지배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유력자에게 촌락지배권을 인정해주고 그를 매개로 지방을 직접 지배해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여덟째,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이 비는 이처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학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해결의 문제가 없지 않다.

첫째,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관계로 비면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전문의 판독이 가능하지만 10여 자 정도는 판독자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 정확한 판독이 요망된다.

둘째, 상면에 글자를 새기고 있어서 이러한 형태를 비로 보아야 할 것인지의 여부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셋째, 비의 건립 연대인 계미년이 연구자 사이에 383년, 443년, 483년, 503년 등의 주장이 있어 많게는 12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 건립 연대의 확정은 최대의 연구 과제라 할 수 있다.

넷째, 사부지왕과 내지왕을 전세2왕(前世二王)이라 한 것, 지도로갈문왕 이하 고위 관리 7명을 7왕으로 표현한 것, 본피부와 사피부의 고위 관리와 지방의 촌주가 똑같이 간지(干支)라는 관등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치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성격과 촌주와 지방지배에 대한 것이다. 우선 촌에는 도사가 파견되는 곳과 촌주가 존재하는 촌으로 나누어, 도사가 파견된 촌을 행정적인 촌이며 중심촌으로, 촌주가 존재하는 곳은 자연촌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촌주가 존재하는 진이마촌 같은 경우를 그냥 자연촌으로만 보느냐 역시 행정적 성격을 지닌 촌으로 보느냐에 따라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진이마촌의 촌주를 진이마촌 출신으로 보기도 하고 도사가 파견된 지역에 세력기반을 가진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따라 신라의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 양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라정부의 직접지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도사가 파견되지 않고 촌주가 있는 촌에도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게 됨으로써 촌주도 촌에 대한 행정을 담당하고 재산분쟁이 일어나자 그 해결이 어려워 국가에 보고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절거리와 분쟁에 참여한 3인은 중심촌에 부속한 자연촌에 세력 근거를 가진 유력자들로서 도사가 파견된 촌에 예속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상대적 독자성을 가지면서 조세수취권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행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아직 신라의 지방지배가 초기 단계이며 국가권력이 여기에 침투해 들어가려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촌과 촌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신라의 5∼6세기 지방지배에 대한 이해가 달라 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절거리에게 소유권을 인정한 ‘재(財)’의 내용에 관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토지, 광산(鑛山), 수조권(收租權), 또는 종교적인 제사권(祭祀權)에 부속된 이권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를 규명하는 것이 이 비의 성격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과제중 하나이다. 또한 재를 둘러싼 분쟁이 절거리와 말추, 사신지 사이에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절거리가 죽고 난 뒤 재사아노와 말추, 사신지간에 벌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가 단순히 혈연관계 사이에 벌어진 다툼으로 보아야 하는지 재지세력 사이의 이권 다툼인지에 대한 성격규명도 이 시기 정치·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과제이다.

의의와 평가

냉수리 신라비는 형태 및 내용상에서 몇 가지 특징과 의의를 보인다. 먼저 형태상에서 볼 때 상면에 촌주와 관련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상면에 글자를 새긴 것은 이 비가 최초이다.

한편, 내용상 의의는 첫째,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비 중에서 포항 중성리 신라비 다음으로 연대가 빠르다는 점, 둘째, 한 인물의 재산 소유와 상속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이 시기 경제 관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셋째, 6부·갈문왕·사라·관등·촌주·도사 등 정치·제도사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다수 보이고 있다는 점, 넷째, 국어학적으로 이두(吏讀)의 성립 시기와 성립 과정을 추정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서체상에서 볼 때 자전(字典)에 나오지 않는 ‘사(斯)’자가 전면에 다섯 번 나오고 있어 신라식 조자(造字)의 방식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 비는 1988년 4월에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긴밀한 상보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5∼6세기 신라의 정치·경제·제도사 정리에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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