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전투는 554년에 관산성에서 백제와 신라가 싸워 백제가 대패한 전투이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이다. 이 전투는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을 계기로 백제, 신라, 가야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공격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를, 신라는 한강 상류를 자치하였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은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관산성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성왕이 신라의 기습공격으로 전사하며 패배하였다. 이후 나제동맹이 완전히 깨져 양국은 적대관계가 지속되었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지방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함산성(函山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5세기 중엽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蓋鹵王, 455∼475)이 피살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천도하였다.
웅진시대 초기 백제의 정세는 귀족들의 반란까지 겹쳐 불안한 상태였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 479∼501)과 무령왕(武寧王, 501∼523)대를 거치면서 점차 안정되어갔고, 성왕(聖王, 523∼554)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제도의 정비와 왕권강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비(泗沘: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로의 천도(遷都)가 단행되었다.
사비천도를 전후해 성왕은 내외의 제반 통치제도와 불교교단을 정비하는 등 체제정비를 도모함으로써 웅진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중흥을 이룩하게 되었다. 사비천도를 통해 중흥을 이루자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의 회복을 꾀하였다.
이에 551년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북진군(北進軍)을 일으켰다. 북진군은 백제군을 주축으로 하여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군과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가야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었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안장왕(安藏王, 519∼531)의 피살, 양원왕(陽原王, 545∼559)대 외척 사이의 내분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북진군은 백제군이 먼저 평양(平壤: 지금의 서울)을 공격, 고구려군을 격파함으로써 승리의 기세를 잡았다.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죽령 이북 고현(高峴: 지금의 철령으로 추정) 이남의 10군을 점령했다.
그러나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한 신라의 진흥왕은 553년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했고,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지역마저 점령한 뒤 그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바로 관산성 전투를 촉발시킨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게 된 배경에는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영토적 야심이 컸다. 또한 신흥 돌궐족의 남하압력을 받고 있던 고구려가 위기극복을 위해 신라와 화해하고 이를 통해 나제동맹을 와해시키고자 신라와 맺은 밀약도 주효했다. 이 밀약을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의 묵인 아래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고 한강 하류지역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의 북진을 막으면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인적 · 물적 자원을 크게 증대시킴으로써 앞으로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백제의 한강유역 상실을 고구려와 신라의 동시압박에 따른 백제가 자신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강유역을 내주고 후일을 기약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해 백제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라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1년이 지난 시점에는 대외환경이 변화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강유역에 대한 백제의 탈환노력이 시도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외적인 요인보다 백제 내부의 갈등 속에서 한강유역의 상실을 보는 견해도 있다. 한강유역은 오랜 기간 동안 고구려에게 점령당했던 지역이고 또한 이 지역은 해씨(解氏) · 진씨(眞氏)와 같은 백제 귀족들과 왕실의 이해관계가 같이 겹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내부적 갈등과 함께 접경지역이라는 공간적 특성이 백제가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없었던 요인으로 보기도 한다.
동맹국 신라의 행동변화는 백제의 한강 유역 상실은 물론, 북진의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백제는 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에 나섰다. 이때 백제의 지배층 안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주전파와 비전파 사이에 의견대립이 나타났다. 주전파는 성왕과 태자 여창(餘昌: 훗날의 위덕왕)이 주축이었고, 비전파는 기로(耆老)들로 대변되는 귀족세력이었다.
결국 주전파의 우세로 신라에 보복을 가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가야는 원군을 파견해 백제군에 가세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어난 양국의 전투는 관산성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관산성이 양군의 결전장이 된 것은 이 지역이 신라에게 있어 새롭게 점령한 한강 하류유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관산성 전투의 초기에는 백제가 우세해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飡) 탐지(耽知) 등이 거느린 신라군을 패주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의 신라 원군이 당도하자 양국 사이에 대접전이 벌어졌다. 이때 성왕은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왕자 여창(위덕왕)을 위로하고자 직접 보기(步騎) 50여 기를 거느리고 야간에 구천(狗川: 지금의 충청남도 옥천 부근)에 이르렀는데, 신라 복병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이때 성왕은 전선에 나가 있는 왕자 여창을 위문하러 가는 길에 신라군에게 길을 차단당해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했고, 그의 머리는 신라 북청(北廳) 계하(階下)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성왕의 전사로 관산성에서의 양국 대결은 신라의 대승리로 끝났다. 이때 백제는 왕을 비롯해 4명의 좌평(佐平)이 전사하고, 또 3만 명에 가까운 사졸들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관산성 전투는 양국이 국가의 운명을 걸었던 싸움이었다. 따라서 승리한 신라는 이미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에 대한 기득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던 반면, 백제는 막대한 전쟁 손실과 그 여파로 인해 동성왕 이후 성왕대에 일시 강화되었던 왕권이 다시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기로(耆老) 중심의 비전파들은 관산성 패전과 성왕의 전사를 계기로 정치적 발언권을 증대시켰고, 이로써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가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로 점차 전환되어 나갔다. 그리고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1세기 이상 양국 사이에 지속되어왔던 나제동맹(羅濟同盟)은 완전히 깨어져 버렸다. 이후 양국관계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관계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