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23~554년이며 무령왕의 아들로 즉위했다.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정치 운영에서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키고 왕권 중심의 국가 운영체계를 확립했다. 사비 천도도 그 일환으로 단행되었고, 중국 양조와 교류하여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숙원 과제이던 한강 유역 탈환을 위해 신라·가야와 연합하여 한강 하류 6군을 회복했으나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이에 다시 신라와 싸우던 중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재위 523∼554. 이름은 명농(明濃). 무령왕의 아들이다. 『양서(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했고,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영민하고 비범하며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했고 『일본서기』에는 “천도 · 지리에 통달해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해 그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 · 무령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 온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해 538년(성왕 16)에 사비(泗沘) 천도를 단행하였다. 성왕의 사비 천도는 고구려의 남침이라는 외부 세력의 강요에 의해 행해졌던 웅진 천도와는 달리 성왕의 의도적인 계획하에 단행된 것이다.
따라서 이 사비 천도는 왕권과 국력 강화 정책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비 천도에는 사비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 沙宅氏)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사비 천도 후 국호를 일시 ‘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해 부여족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양조(梁朝)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모시박사(毛詩博士) · 공장(工匠) · 화공 등을 초빙하고 『열반(涅槃)』 등 경의(經義)를 수입해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힘썼다.
또한 성왕은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해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시키고, 아울러 담욱(曇旭) · 혜인(惠仁) 등이 지은 『율소(律疏)』 36권에 친히 비담신율서(毗曇新律序)를 써서 백제 신율을 성립시켰다. 성왕의 이러한 계율의 장려는 불교 교단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송해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보내 줌으로써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의박사 ·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 문물의 전수자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비 천도를 전후해 웅진시대 이후 이루어졌던 내외 관제를 정비해 지배 체제의 정비와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 관제로는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 또 왕도의 통치 조직으로는 수도를 상부 · 전부 · 중부 · 하부 · 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5항제를 정비하였다.
지방 통치 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檐魯制)를 개편해 전국을 동방 · 서방 · 남방 · 북방 · 중방의 5방(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5방 · 군 · 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 운영에서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왕은 국제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 온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그대로 지속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해 나갔다. 그리고 양(梁) 및 왜(倭)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한편, 성왕은 숙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 탈환 작업에 나섰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551년에 백제군을 주축으로 해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일으켰다.
이 연합군은 북진해 백제군이 먼저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공격, 격파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해 고구려군을 패주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 관계를 무시한 채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고자 당시 남북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처해 있던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553년에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해 옴으로써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되었다.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의 실지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자 성왕은 554년에 비전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여기에는 가야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양국의 싸움은 관산성(管山城)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싸움에서 초기에 우세를 보였던 백제는 성왕이 구천(狗川) 지역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사함으로써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해 4명의 좌평이 전사하고 3만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전사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 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 대까지 확립되었던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양국은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원수의 관계가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서 삼국의 역학 관계의 성격을 결정 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