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519∼531. 이름은 흥안(興安)이다. 문자왕의 장자로 태어나 498년(문자왕 7)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문자왕의 사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중국 양(梁)나라로부터 ‘영동장군 도독 영평이주제군사 고구려왕(寧東將軍都督營平二州諸軍事高句麗王)’에 봉해졌고, 북위(北魏)로부터도 ‘안동장군 영호 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安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에 봉해졌다. 이와같이, 중국의 남북조 양쪽에서 지위를 인정받는 한편, 양측과 조공무역관계를 유지하여 전대에 이미 확립된 대중국 양면외교정책을 따라 행하였다.
이러한 양면외교정책은 남북조의 분열을 이용하여 대중국방면의 안정을 추구하던 고구려의 전통적 외교정책이었던 것이다. 523년과 529년에는 백제를 침략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남진정책을 계속 추진해나갔음을 보여준다.
내치에 있어서는 자료의 인멸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다만, 왕의 재위기간에 고구려의 장기간의 안정이 점차 동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지배체제의 동요 가운데 왕도 피살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중국 미녀와의 연애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나 그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왕이 죽은 해에 대하여, 『양서』에는 526년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531년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