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조선총독부 건물 ( )

현대사
유적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준공한 조선총독부의 행정 시설.
이칭
이칭
조선총독부 건물
유적
건립 시기
1926년
관련 국가
일본|조선
관련 인물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
높이
23.3m[건물]|54.7m[첨탑]
길이
131m
깊이
70m
면적
6,980㎡[건평]|31,693㎡[총면적]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구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준공한 조선총독부의 행정 시설이다. 일제는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후 기존의 통감부 건물을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경복궁 자리에 신청사를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26년 준공된 이 건물은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고, 군림하는 일본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에 의해 건물 해체가 시작되어 1996년 12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준공한 조선총독부의 행정 시설.
건립경위

1910년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하면서 식민 통치기관으로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는데, 처음에는 기존의 통감부 건물을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이 일본 정부에 신축 청사 예산을 요청하면서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 추진이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내에 청사의 대지를 내정하고 설계에 착수하였다. 청사의 설계를 독일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에게 의뢰하였는데, 그는 설계 도중 1914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게오르그 데 라란데의 설계를 바탕으로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와 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가 설계를 담당하였다.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1916년에 착공하여 1926년 준공되었다. 건물 위치는 경복궁 근정문(勤政門)의 남쪽, 광화문(光化門)의 북쪽 사이였다. 일제는 이 건물을 짓기 위해 궁성의 정문인 광화문을 동측 후편으로 이전하였고, 홍례문과 그 회랑 그리고 금천(禁川)에 가설하였던 영제교(永濟橋)를 철거하였다. 건물은 건평 6,980㎡[약 2,115평], 총면적 3만 1693㎡[약 9,604평]의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로, 당시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물이었으며 최고의 기술진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건물 건축을 위하여 막대한 재정지출이 있었고, 건물 건립 전후로 경복궁 7,500여 칸 중 4,000여 칸이 훼손되었으며, 연인원 200만 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변천

조선총독부 건물은 8·15광복 직후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되면서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 불렸고, 1948년 정부수립 후 정부 청사로 쓰이면서 ‘중앙청’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화재가 나기도 하였으나 복구하여 1983년까지 정부 청사로 사용하였고, 1986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조하였다. 일제가 남긴 건물이지만, 일제의 항복 문서 전달, 제헌국회의 개원,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이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8·15광복 이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제기되어 왔으며,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 이후 김영삼 정부에 의해 철거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 건물 철거를 추진한 정부의 결정을 두고 찬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결국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중앙 돔의 해체를 시작으로 건물 철거가 진행되어, 1996년 12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독립기념관은 1998년부터 철거된 중앙 돔과 건축 부재로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을 개원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형태와 특징

건물의 높이는 23.3m, 첨탑의 높이는 54.7m였고, 길이는 131m, 깊이는 70m였다. 르네상스양식에 바로크양식을 절충한 네오르네상스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철근콘크리트건축물로서 기둥 사이의 벽은 벽돌로 쌓고, 외면과 중정(中庭) 내의 바깥벽 징두리 벽에는 화강석을 붙여 쌓았다. 기타 중정 내외의 벽은 전부 인조석으로 마감하였다. 동 · 남 · 서 3면에는 베란다를 뚫어 놓았고 중앙부에는 돔을 두었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을 가로막은 이 건물을 통해, 일제는 민족의 상징을 가로막고 우뚝 서서 군림하는 일본 통치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건물 곳곳에 반영되었는데, 중앙의 첨탑은 일제의 상징인 천황의 황관(黃冠)을 나타냈고, 6개의 ‘일(日)’ 자형 기둥이 첨탑을 떠받치고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건물은 ‘대(大)’ 자형인 북한산과 ‘본(本)’ 자형인 경성부청[서울특별시청]과 함께 공중에서 보면 대일본(大日本)을 형상화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건물들은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관통하면서 서울의 중심축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도록 3.5도 비뚤어지게 만들어졌다.

참고문헌

단행본

『구 조선총독부 건물 실측 및 철거 보고서』 2(국립중앙박물관, 1997)

논문

김동하, 「조선총독부의 경복궁 청사 건립 과정」(『서울과 역사』 111, 서울역사편찬원, 2022)
정희선,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청사의 변천과 그 의미」(숙명여자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17)
장기인, 「조선총독부 청사」(『대한건축학회지』 35-2, 대한건축학회, 1991)

인터넷 자료

집필자
이상록(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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