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열

  • 역사
  • 인물
  • 일제강점기
  • 현대
대한민국의 의거 학생으로, 1960년,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마산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희생된 인물.
이칭
  • 본명김영용
인물/근현대 인물
  • 관련 사건3·15부정선거
  • 본관김해(金海)
  • 사망 연도1960년 3월 15일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944년 10월 7일
  • 출생지전라북도 남원
집필 및 수정
  • 집필 2021년
  • 이상록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최종수정 2024년 07월 04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주열은 대한민국의 의거(義擧) 학생으로, 1960년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마산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희생되었다. 김주열은 3월 15일 시위 당일 실종되었는데,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그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일어났고, 이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정의

대한민국의 의거 학생으로, 1960년,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마산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희생된 인물.

인적 사항

김주열(金朱烈)은 1944년 10월 7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56년 남원 용정국민학교(지금의 금지동초등학교)를 거쳐 1959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59년 남원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자퇴하였다. 1960년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시험 후 마산 3 · 15의거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사망 경위와 4 · 19혁명에의 영향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시험 합격자 발표일 하루 전인 1960년 3월 15일에 형 김광열과 함께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 · 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실종되었다. 실종 27일 후인 4월 11일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에 그의 시신이 떠올랐다. 시신의 얼굴 눈 부위에는 탄피가 알루미늄으로 된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이 최루탄은 3월 15일 경찰이 시위 진압을 위해 군중을 향해 쏜 것이었다. 시위 진압 후 김주열의 시체를 발견한 경찰은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시체를 차에 싣고 마산 앞바다에 유기하였다.

4월 11일 오후 시신 발견 소식을 전해 들은 마산 시민들은 시신이 안치된 마산도립병원으로 몰려갔고, 오후 6시경부터는 거리에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시위대는 “죽은 내 자식을 내놓아라.” “살인 선거를 물리치자.” “살인범을 잡아내라.” “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마산 시내의 경찰서와 파출소, 시청과 관공서, 자유당 마산시당부, 서울신문사 마산지사 등을 습격하였다.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부터 시작된 제2차 마산의거는 4 · 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0년 4월 14일 고향 선산인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남원 우비산 자락에 안장되었으며, 1995년 마산상업고등학교는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2010년 김주열이 희생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에는 범국민장이 김주열의 시신 인양지에서 거행되었다.

참고문헌

  • 단행본

  • - 『3·15의거사』(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 - 『3·15의거사진집』(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 - 『김주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 논문

  • - 이은진, 「3·15마산의거의 지역적 기원과 전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혁명 50주년 기념연구총서 1: 4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선인, 2010)

  • - 김행선, 「김주열, 4월혁명의 횃불로 부활한 한 알의 밀알」(『내일을 여는 역사』 33, 내일을여는역사재단, 2008)

  • - 박태순, 「4월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의 시신」(『역사비평』 18, 역사비평사, 1992)

  • 신문

  • - 「마산 바다 속에서 총 맞은 시신 발견」(『부산일보』, 1960. 4. 12.)

  • - 「인양된 시체 신원 확인되자 흥분」(『동아일보』, 196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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