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

정치
단체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존재한 한국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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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존재한 한국의 정당.
개설

1951년 12월 23일에 이승만(李承晩)을 당수로 이범석(李範奭)을 부당수로 창당된 자유당은 초기에는 협동사회 건설을 내세우며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강행하기 위한 대중동원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초기 자유당의 핵심세력이었던 족청계(族靑系) 인사들이 제거되어 이기붕(李起鵬)을 중심으로 한 체제로 바뀌면서 이승만 개인을 위한 사당(私黨)이라는 성격이 강해졌으며 그렇게 이념성이 퇴색됨에 따라 공권력과 정치깡패에 크게 의존하게 되어 결국 3·15부정선거를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설립목적

1951년 8월 15일에 이승만은 “농민과 노동자들을 토대로 삼아 일반 국민이 나라의 복리와 자기들의 공동복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정당을 만들 의사를 밝혔다. 자유당 창당 시에 발표된 ‘자유당선언’에서도 “미증유(未曾有)의 내우외환(內外憂患)의 국난을 극복하고 국토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도모하며 만민(萬民)이 공생공영(共生共榮)할 수 있는 협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자유당을 조직했음을 내비쳤다. 아울러 “이기주의적 자본만능(資本萬能)의 사회를 획책하는 세력에 맞설 것”을 당의 목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지주와 자본가의 정당’으로 인식되는 야당 민주국민당에 대항하는 데 있었다.

연원 및 변천

1950년 말부터 1951년 초반에 걸쳐 발생한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등을 통해 이승만정권의 무능과 무책임이 드러난 결과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이 사임하고 야당인 민주국민당의 김성수(金性洙)가 국회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대통령 선출권한이 국회에 있었기 때문에 임기가 끝나는 1952년을 앞두고 재집권에 불안을 느낀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했으며, 그 기반으로 1951년 8월 15일에 ‘광복절기념사’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새 정당을 만들 의사를 밝혔다. 이를 계기로 국회 안팎에서 새 정당 조직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졌는데, 국회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진행된 신당 결성 움직임은 결국 1951년 12월 23일에 두 개의 자유당이 창당된는 결과를 낳았다. 국회 내부에서 국회의원 중심으로 조직된 자유당은 ‘원내자유당’이라고 불렸으며 국회 외부에서 대중단체를 기반으로 조직된 자유당은 ‘원외자유당’이라고 불렸는데, 원래 통일노농당이라는 이름으로 신당을 추진하던 원외 세력이 원내 세력과의 합동을 위해 당명을 자유당으로 바꾼 결과였다. 하지만 결국 합동은 성사되지 않았으며 원내자유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추진해 이승만정권의 반대세력이 되었다. 원외자유당은 이승만을 당수로 이범석을 부당수로 선출했으며 국민회, 대한노동총연맹, 대한농민총연맹과 같은 대중단체 간부들이 원외자유당 간부진을 구성했다. 원외자유당은 1952년 3월에 본격적인 체제정비에 들어갔는데, 이때 당내 최대세력을 형성한 것이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족청계였다.

1952년 5월에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을 선포해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강행했으며 그때 족청계를 중심으로 한 원외자유당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대통령선거를 앞둔 1952년 7월에 개최된 원외자유당 전당대의원대회에 이승만은 메시지를 보내 당수·부당수제를 없앨 것과 자유당에서 자신을 대통령후보로 지명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는 부당수인 이범석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승만이 원외자유당 및 이범석과 거리를 둔 결과 원외자유당에서 부통령후보로 출마한 이범석은 낙선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원외자유당은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1952년 9월 18일에 원내외 자유당이 합동함으로써 반족청계 세력의 힘이 강해지는 가운데 9월 26일에 열린 전당대의원대회에서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당수·부당수제가 총재제로 바뀌었으며 이튿날에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당 지도부가 중앙집행위원회체제에서 각 단체대표로 구성되는 중앙위원회체제로 개편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와 같은 공세에 족청계가 반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승만의 지시로 1953년 12월에 이범석을 비롯한 족청계 인사들이 자유당에서 제명되었으며 새로 총무부장이자 수석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이기붕이 자유당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기붕은 당내에서 주류파를 형성했지만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이기붕이 낙선하자 대중단체를 기반으로 한 비주류파의 공세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개입으로 주류파는 이 위기를 넘겼으며, 1957년에는 당헌을 개정해 당의 실질적 운영기구로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당무위원회를 신설해 주류파가 당권을 완전히 독점하게 되었다. 당무위원회를 통해 이기붕은 친일관료 출신들과 기업가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함으로써 자유당의 인적 재편을 꾀했다. 자유당 내부에서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 등 파벌대립이 끊이지 않았으나 이승만의 권위를 배경으로 한 이기붕의 지도 아래 행동통일이 이루어졌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 부정선거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를 사임했으며 이기붕 역시 당 중앙위원회 의장을 사임했다. 또 다른 자유당 간부들도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거나 구속 또는 해외도피가 잇따라 자유당은 실질적으로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명목상으로만 존속하다가 1961년 5월 23일,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해산을 명령한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로 해산되었다.

기능과 역할

대중단체를 기반으로 조직된 원외자유당은 당의 말단조직으로 9인조 세포를 두어 대중정당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한편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국회의원총회에는 거의 아무런 권한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 초기에 큰 특징이었다. 실제로 원외자유당은 이승만 재집권을 목적으로 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대중동원을 수행했다. 하지만 족청계를 제거하고 이기붕 중심으로 재편된 자유당은 1954년 3월에 개최된 전당대의원대회에서 ‘정당정치의 확립’을 당면목표로 채택하는 등 대중정당에서 의회정당으로의 탈바꿈을 시도했으며, 실제로 1954년 5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자유당의 정치형태는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당으로 변화했다. 그렇지만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된 자유당이 바로 시행한 것이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사사오입개헌’이었던 것처럼, 이 변화는 이승만 개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당이라는 성격이 강해지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념이 약해지고 사적인 권력집단으로서의 성격이 짙어질수록 자유당은 공권력과 정치깡패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1960년 3·15부정선거로 절정에 이르렀다.

의의와 평가

자유당은 대한민국 최초의 본격적인 여당이라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리고 대중정당으로 출발해 결국 관료화된 자유당의 성격 변화는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생각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승만과 제1공화국』(서중석, 역사비평사, 2007)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후지이 다케시,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1950년대 후반 자유당정권과 정치깡패」(서준석, 성균관대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0)
「1956∼1960년 자유당 과두체제 형성과 운영」(오제연,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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