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청년단은 1946년에 서울에서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청년단이다. 광복군 출신이 주축이 되어 만든 단체로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건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다. 좌익 출신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도 했다. 1948년 11월부터 청년단체 통합이 추진됨에 따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해산 뒤에도 세력을 형성해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이범석이 이승만의 경계대상이 되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은 미군정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그 이념은 민족적인 주체 형성에 있었다.
조선민족청년단의 규약에서 제시한 네 가지 설립목적은 다음과 같다. “가. 朝鮮靑年의 民主主義精神을 發揮하게 하여 健全한 身體와 活潑한 精神과 善美한 道德을 兼備함으로써 將來 朝鮮 建設에 貢獻함. 나. 眞實한 朝鮮靑年됨을 期함. 但 非政治的, 非軍事的, 非宗派的으로 함. 다. 朝鮮靑年의 愛國心을 發揚하게 하며 祖國을 爲하여 犧牲的 奮鬪로써 完全獨立을 戰取하게 함. 라. 國際親善과 世界平和에 貢獻함.”
단지(團旨)에는 “1. 우리는 民族精神을 喚起하여 民族至上 國家至上의 理念下에 靑年의 使命을 다할 것을 期함. 2. 우리는 宗派를 超越하여 對內自立 對外共存의 精神下에 民族의 力量을 集結할 것을 期함. 3. 우리는 現實을 直視하여 遠大한 곳에 着眼하고 卑近한 點에 着手하여 建國途上의 靑年다운 純誠을 밭일 것을 期함”의 세 가지를 내걸었다.
1946년 10월 9일에 이범석(李範奭), 이준식(李俊植), 노태준(盧泰俊) 등 광복군 제2지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최규동(崔奎東), 현상윤(玄相允), 백낙준(白樂濬), 김형원(金炯元), 김활란(金活蘭) 등 주로 미군정과 가까운 대학 총장 및 언론인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민족청년단 발기인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발기인 회장인 이범석이 단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강욱중(姜旭中) 외 36명의 전국위원과 김웅권(金雄權) 외 11명의 상임이사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사단법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 창단되었는데, 미군정은 창단할 때부터 500만원의 지원금을 약속했으며 그 뒤 족청을 미군정 산하의 한 부서로 간주해 공식적으로 1년에 약 2,000만원의 예산을 할당했다.
족청은 최고의결기관으로 전국위원회를 두었으며, 전국위원회에서 선임된 이사들로 구성된 중앙이사회가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다. 그 밑에 도에서 면에 이르기까지 각 단위의 지방위원회와 지방단부가 조직되었으며, 각 단에 총무부, 조직부, 선전부, 훈련부, 연구위원회, 훈련소를 두었다.
중앙본부는 단장 이범석 밑에서 김형원과 이준식이 부단장을 맡았으며 조직부장 노태준, 선전부장 송면수(宋冕秀), 훈련부장 안춘생(安椿生) 등 광복군 시절부터 이범석과 함께 활동해온 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수원에 설치된 중앙훈련소에서도 이범석이 직접 소장을 맡았으며 부소장도 송면수, 이준식, 안춘생 등 모두 광복군 출신들이 맡았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단명을 대한민족청년단으로 고쳤으며,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범석이 단장을 사임해 부단장이었던 이준식이 단장이 되고 이범석은 총재로 추대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이승만의 지시로 청년단체 통합이 추진되어 족청도 저항 끝에 1949년 1월 20일에 개최된 전국이사 및 도단장 연석회의의 결정으로 해산하고 새로 조직된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해산 뒤에도 족청 출신들은 ‘족청계’라고 불리는 세력을 형성해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1953년 12월에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이들이 자유당에서 제명되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다른 우익청년단이 대체로 좌익에 물리력으로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된 데 반해 족청은 직접적으로 좌익과 충돌하는 일은 없었으며, 기본적으로는 훈련을 통한 청년들의 조직화에 힘을 기울였다.
1946년 11월 말부터 훈련을 시작한 수원 중앙훈련소에서는 1948년 3월의 9기까지 이미 각 지역에서 청년운동을 해 온 이들을 대상으로 훈련이 실시되어 간부들을 양성했으며 1948년 7월에 중앙훈련소를 서울 우이동으로 옮긴 뒤에도 훈련이 계속되었다. 중앙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이들이 다시 원래 활동하던 지역으로 돌아가서 족청의 지방단부를 조직해 거기서 지역 청년들을 훈련하는 방식으로 족청은 계속 그 세를 늘려갔다.
비정치를 내세워 정계 동향과는 무관하게 조직 확대에만 치중하던 족청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1947년 하반기부터 남한 단독선거를 지지하는 입장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1948년 2월에 개최된 전국위원회에서 격론을 거친 다음 공식적으로 단독선거 참여를 표명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진 선거에는 족청에서 19명이 출마했고 그 가운데 강욱중, 문시환(文時煥) 등 6명이 당선되었으며, 족청 관련 의원들은 대체로 청구회(靑丘會)에 소속해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단원이 100만 명을 웃돌던 족청은 이범석이 이승만을 잇는 정계 제2인자 자리에 올라서게 되는 큰 배경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범석을 이승만의 경계대상으로 만들기도 했다.
족청은 미군정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거기서 실시된 훈련의 이념적 중심은 친미적인 시민 양성이라기보다는 민족적인 주체 형성에 있었다. 파시즘과 저항민족주의가 교차하는 족청의 이념은 좌익 청년들의 적극적인 포섭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와 같이 냉전 구도에서 벗어난 족청의 민족주의는 좌익과 우익이 복잡하게 얽힌 해방 직후에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