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준은 해방 이후 연세대학교 총장 · 문교부장관 등을 역임한 교육자 · 정치인 ·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6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1927년 예일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7년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고, 훗날 연희대학교 초대총장(1946년)에 취임하였다. 1942년 일제침략정책에 부응한 편집과 황민화정책 및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설교와 사설을 집필하였다. 1950년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4후퇴 후 전시교육체제를 정비하고 교육정책의 기초를 닦았다. 1960년 참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초대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아호는 용재(庸齋), 영어명은 조지 백(George Paik), 재미시절 별명은 백성빈(白成彬)이었으며, 창씨개명한 이름은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이다.
1896년 3월 9일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삽동 가난한 농촌에서 백영순의 4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러일전쟁 후 서당이 없어지면서 기독교 교회에서 세운 영창소학교를 다녔다. 1910년 9월 평안북도 선천에 있는 기독교 중학과정인 신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해 양친과 형이 모두 타계하였다. 1911년 초 105인사건 연루자로 지목되었으나 신성학교 교장인 매큔(G. S. McCune)의 도움으로 피신해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13년 신성학교를 졸업한 후 매큔 교장의 도움으로 중국 텐진의 영국인 교회학교 신학서원에서 3년간 수학하며 영어를 배운 후 1916년 9월 미국으로 갔다. 매큔의 모교인 미주리주의 파크대학(Park University)에 들어가 서양사를 전공하였다. 1922년 6월 파크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에 들어가 1925년 9월 졸업하였다. 바로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대학원에 입학해 종교사학을 전공하여 1927년 「조선개신교사」로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바로 귀국하여 1927년 9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영국 왕실아세아학회 한국지부 이사로 위촉되었다. 1934년 『원두우(H. G. Underwood) 목사 소전』 을 저술하였다. 1936년을 전후하여 연희전문학교 문과 과장을 맡으면서 조선총독부의 탄압 속에서도 국학 과목을 신설하고 연구를 후원하였다. 1940년 1월 일본기원2600년 봉축신도대회에 참석해 「총후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40년 이후 경성노회 소속 목사로 연희전문학교에서 시무하였다. 1941년 1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예수교 장로회 포교자로 허가를 받았다. 같은 해 8월 20일 조선예수교 장로교도 비행기기부회 부회장으로 임명되었고, 8월 25일 조선임전대책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2년 2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 장로회총회연맹이 주최한 지방시국강연회 연사로 선정되어 경의선 지역을 순회강연하였다. 4월 기독교 각파의 합동기관지인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및 『기독교신문』 편집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일제침략정책에 부응한 편집과 황민화정책 및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설교와 사설을 집필하였다. 1942년 4월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유지재단 이사회 이사 및 회계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6월 조선예수장로회 총회장 최지화(崔志化), 교육부 총무 정인과 · 이용설(李容卨) · 오문환(吳文煥)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에 육군환자용 자동차 2대분인 2만 3천원의 기부금을 바쳤고,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비행기기부회에서 제공한 돈으로 구입한 일본해군전투기 헌납기념식에 참석하였으며, 11월 경성경기합동노회 규칙부원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9월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유지재단의 이사에 재선임되었다.
해방 후 1945년 9월 미군정청 학무국 조선인교육위원에 선임되었고,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이 되어 시설과 직원을 정비하였다. 10월 서울대학교 전신인 경성대학 법문학부 부장에 임명되었고, 12월 법문학부 서양사교수를 겸임하였다. 1946년 1월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8월 연희대학교로 변경되면서 초대총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교육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0월 대한소년단 총재로 임명되었다.
1950년 5월 연희대학교 총장에서 물러나 문교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 · 4후퇴 후 피난지에서 초 · 중 · 고교의 노천수업을 실시하여 전시교육체제를 갖추었고, 의무교육법을 실시하였고, 교육자치제, 교육감선임, 학 · 예술원 설립안 제출, 교과서주식회사 설립, 지방국립대학 발족 등 교육정책의 기초를 닦았다. 문교부장관으로 1952년 10월까지 재임하면서 연희대학교 이사장을 맡았다.
문교부장관에서 물러난 후 1953년 연희대학교 총장으로 복귀하였고, 대한 YMCA 연맹 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1954년 10월 세브란스 의대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1955년 1월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사장을 맡았다. 1957년 1월 연희대학과 세브란스의대를 통합해 연세대학교를 설립해서 초대총장으로 취임해 1960년 5월 정년퇴임하였다.
1960년 4ㆍ19의거 그 해 7월 참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에서 출마해 서울시민 1/4의 지지를 얻어 전국 최고득표로 당선되었고, 8월 초대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2월 IPU(국제의회연맹) 한국협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1년 5 · 16쿠데타 직후 미국 북장로교회 교육처 고문으로 초빙되어 도미하여 남미, 인도 등지의 기독교 교육기관을 감사하다가 1963년 귀국하였다. 1961년 5월부터 1985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으로 지냈다. 1962년 미국 뉴욕대학이 세계적 인물에게 수여하는 뉴욕대학교메달을 받았고, 1965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교회와 사회’ 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 1966년 9월 민중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고사하였고,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 양당의 합당추진을 지지하면서도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1968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8월에는 국토통일원 국토통일자문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1980년 2월 국정자문회의 위원, 1983년 2월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5년 1월 13일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엄수되었고, 장례위원장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맡았으며,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주요 저서로 『언더우드 목사전』, 『한국교육과 민족정신』, 『한국의 이상과 현실』, 『나의 인생관』 등이 있다. 1970년 8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1987년 5월 연세대학교에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연세대학교에서는 1995년부터 백낙준 박사 탄생 100돌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그의 국학진흥노력을 기리고 계승하고자 ‘용재 석좌교수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백낙준의 생애 및 활동사항 가운데 특히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활동으로서 1941년 8월 25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42년 4월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및 『기독교신문』 편집위원으로서 일제의 황민화정책 및 전쟁협력을 강조하는 설교와 사설을 집필하는 한편 같은 해 6월 조선예수장로회 총회장 최지화 등과 함께 조선군사령부에 기부금을 헌납하는 등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 “사회 · 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협력한 행위”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87~811)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