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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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인물
일제강점기 경성상공협회 회장, 경성경제통제협력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한 기업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4년(고종 1) 6월 22일
사망 연도
1950년 12월 20일
본관
밀양(密陽)
출생지
경기도 광주
관련 사건
중일전쟁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박승직은 일제강점기 경성 상공협회 회장, 경성경제통제협력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한 기업인이다. 1882년부터 송파장에서 포목 행상을 시작해 1889년에는 경성 배오개에서 박승직상점을 열였다. 1915년 화장품 제조업에 진출하여 박가분을 세웠다. 1917년에는 미곡 판매 및 정미업에 진출, 1918년 경성포목상조합 조합장에 추대되었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 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해방 후 양조업과 운수업으로 눈을 돌려 1946년 10월 일본식 상호인 미키상사를 박승직상점으로 환원했다가 1948년 두산상사로 바꾸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경성상공협회 회장, 경성경제통제협력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한 기업인.
개설

1864년 6월 22일 경기도 광주에서 아버지 박문회(朴文會)와 어머니 허씨(許氏)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대한제국기에 성진감리서 주사, 중추원 의관, 공익사(公益社) 사장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박승직상점 사장을 지내면서 직물상공제회 회장, 경성상공회의소 회장,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등으로 위촉되었다. 1950년 12월 20일 사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아버지가 경작하는 토지의 지주인 민영완(閔泳完)이 해남현감으로 부임할 때 동행하였다. 해남에서 모은 돈 300냥을 형 박승완(朴承完)에게 보내 1882년부터 송파장에서 포목행상을 시작한 것이 박승직상점의 시초이다. 1884년 해남에서 돌아와서 형과 함께 장사를 하다가 1886년부터 단독으로 포목상을 하였다.

처음에는 송파장에서 물건을 구입하여 내륙을 순회하며 행상을 하였고, 뒤에는 제물포에서 수입상품을 직접 구입하여 경기도와 강원도까지 진출해 적지 않은 자금을 마련하였다. 상술이 좋아 1889년에는 경성 배오개(종로 4가 92번지)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1896년 6월 종로 4가 15번지로 근거지를 옮겼다. 박승직상점에서 영국산, 일본산 등 다양한 직물을 취급하며 거상으로 성장했다.

1900년 12월 성진감리서 주사, 1905년 4월 중추원 의관을 지내며 짧게 관직생활을 하였다. 1905년 7월 광장주식회사 발기인과 취체역을 맡았다. 같은 달 한성상업회의소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해서 1906년 1월 상의원, 1909년 상임위원을 맡았다. 1906년 합명회사 창신사(彰信社)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07년 8월 최인성(崔仁成)과 합동으로 자본금 2만 900원으로 합명회사 공익사(公益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는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과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14년 공익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자본금이 50만원으로 증자되었는데, 일본 자본이 유입되어 조 · 일합자회사가 되었다. 공익사는 국내 및 만주 각지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1915년 화장품 제조업에 진출하여 박가분(朴家粉) 본포(本鋪)를 세웠고 1918년 특허국에 박가분 상표를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1920년 이후 선풍적인 인기로 판매되었으나 1930년대부터 일제 고급화장품의 수입시판으로 1937년 폐업하였다.

1917년에는 미곡 판매 및 정미업에 진출하여 예지동(동대문시장)에 공신상회(共信商會)를 설립하였다. 1918년 경성포목상조합 조합장에 추대되었다. 1919년 3월 고종 국장(國葬) 때 상인봉도단(商人奉悼團)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3월 만주공익사를 설립해서 감사역을 맡았고, 9월 직물상공제회 회장, 11월 조선경제회 발기인과 취체역, 1920년 1월 동양염직㈜ 취체역을 지냈다.

1921년 6월과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 준비위원과 지방위원, 같은 해 10월 경성곡물신탁㈜ 감사역을 맡았다. 1922년 11월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도모와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목적으로 조직한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 등 임원을 역임하였다. 1923년 10월 교육실천회 특별회원, 1924년 4월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2월 박승직상점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세를 확장하였다. 1926년 순종 국장 때 상인봉도단을 이끌었고, 1927년 이상재(李商在) 사회장에서 준비위원을 맡았다. 1930년 2월 경성상공협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31년 10월 중앙일보사 취체역을 맡았다. 1933년 12월 쇼와기린맥주주식회사[昭和麒麟麥酒株式會社] 주주와 취체역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경성창고금융㈜과 조선직물㈜ 감사역으로도 활동하였다. 1934년 2월 경성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37년 4월 경성상공조합연합회에서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2월 조선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쌍수(雙手) 들어 축하」(『매일신보』1938.2.23.)라고 징병제를 환영하는 글을 썼다. 같은 해 8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평의원과 국민정신총원 경성부연맹 상담역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11월 친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평의원, 1940년 6월 경성경제통제협력회 상임이사,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위촉되었다.

1940년 8월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이듬해인 1941년 3월 박승직상점을 미키[三木]상사주식회사로 개칭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12월 경성부 총력과를 방문해 해군 국방헌금으로 1만원을 헌납하였다. 1943년 2월 방공협회를 통해 방공감시대 위문금 100원, 5월 육군에 국방헌금 200원을 냈다.

해방 후 양조업과 운수업으로 눈을 돌렸다. 1945년 장남 박두병(朴斗秉)이 쇼와기린주식회사의 관리지배인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10월 임시정부요인을 맞기 위한 한국지사영접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에는 처 정정숙과 장남의 처 명계춘이 두산상회라는 상호로 운수업을 시작하였다. 그해 10월 일본식 상호인 미키상사를 박승직상점으로 환원하였다가 1948년 두산상사로 바꾸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1881.10.29.)
『매일신보』(1937.4.16.)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박승직상점, 1882~1951년』(김동운, 혜안, 2001)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 기업가 이야기』(고승제, 한국경제신문사, 1991)
『한국기업가사』(조기준, 박영사, 1983)
『실록 재계백화』(배명진, 국제신보사, 197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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