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사(共益社)는 경성의 한국인 포목상들이 일본산 기계제 면포[生金巾]를 안정적으로 공급 받기 위해 십시일반 출자하여 설립한 회사로 이름에서 보이듯이 사실상 동업조합의 성격을 가졌다. 기존에 박승직 등 한국인 포목상들은 합명회사 창신사(彰信社)를 통해 일본 후지가스방적회사(富士瓦斯紡績會社) 제품을 독점 수입하고 있었는데, 내부 불화로 인해 관계를 단절하고 별도로 면포 수입회사를 설립하였다. 공익사는 일본 생산지와의 안정적 직거래를 통해 국내 시장에서 일본 포목상들과의 경쟁력 제고를 목표로 하였다.
공익사는 당시 일본 정·재계에서 활동하던 정상(政商) 니시하라의 주창으로 박승직·최인성(崔仁成)·김원식(金元植)·최경서(崔景瑞) 등 한국인 포목상 30~40명이 자본금 2만 600원을 출자하여 합명회사 형태로 설립하였다. 회사는 경성부 남대문통 2정목(丁目) 133에 있었다. 초대 사장은 박승직이었으나, 니시하라가 전무이사에 취임하여 실질적인 경영권을 가지고 있었다.
공익사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 대자본의 참가를 토대로 무역회사로 급성장하였다. 1910년 거래 관계에 있던 오사카(大阪) 소재 이토추(伊藤忠)합명회사의 자본 참가로 자본금을 4만 6600원으로 증자했고, 1914년에는 다시 자본금을 50만 원(12만 5000원 불입)으로 대폭 증자하는 한편 주식회사 체제로 재편하였다. 이를 통해 국내와 일본에 출장소를 증설하였고, 만주에도 진출하여 봉천(奉天)·장춘(長春)·안동(安東)·하얼빈(哈爾濱)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면사포 거래를 중심으로 조선과 일본, 만주를 아우르는 국제 무역 유통망을 구축한 것인데, 만주의 경우 1919년 주식회사 만주공익사(滿洲共益社)를 설립하여 사업을 분리하였다.
1920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불황에 대응하여 자본금을 100만 원으로 증자(25만 원 불입)하였다. 이토추합명회사가 1대 주주였으나, 박승직도 5%의 지분을 확보하여 3대 주주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는 주력 사업인 무역업 외에도 운송업·수산업·광산업·제조업, 그리고 관계된 회사의 주식 및 사채 인수 등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상사(商社)와 같은 형태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일제 말까지 존속하였다.
공익사는 한말 일본산 기계제 면사포를 수입하여 한국 포목상에게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두산그룹의 창업자인 박승직의 경우 초대 사장에 취임하여 1930년대 말까지 장기간 지위를 유지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당시 박승직이 경영했던 박승직상점(朴承稷商店)은 공익사로부터 장기간 면사포 공급을 받았고, 공익사 이익금의 일부가 상점 운영자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박승직이 사장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익사는 한국 포목상들이 일본 상인들과의 경쟁을 지속해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배오개 전통 상인’ 박승직이 근대 기업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회사였다고 할 수 있다.
공익사는 한말 일본산 면사포 공급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 상인들 간의 경쟁과 협력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업이다. 아울러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상점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 1세대 자본가그룹의 성장 과정, 나아가서는 한국 브루주아지 계급의 형성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회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