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이포제철소는 1917년 일본 미쓰비시 재벌 계열사인 미쓰비시 제철에 의해 황해도 송림면에 건설된 제철소이다. 황해제철연합기업소(黃海製鐵聯合企業所)라고도 한다. 재령과 은율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철광석을 원료로 선철과 강재를 생산하여 일본에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미쓰비시 재벌의 주력 제철소로 1921년 일본 해군의 군축 방침이 결정되면서 생산에 타격을 입었다. 1934년에 일본제철주식회사 산하의 분공장이 되면서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전쟁 수행을 위한 선박 건조에 필요한 강재를 조달하는 핵심 군수공장이었다.
미쓰비시재벌의 본사격인 미쓰비시합자회사(三菱合資会社)는 1912년 식민지 조선의 겸이포에 제철소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인근 재령(載寧), 은율(殷栗) 등의 광산에서 비교적 양질의 철광석이 산출되었기 때문이다.
미쓰비시는 이들 철광석을 원료로 연간 10만 톤의 선철(銑鐵)을 생산하는 한편, 그 일부를 제강하여 4만 톤 정도의 조선용(造船用) 강재(鋼材)를 생산, 일본에 공급하고자 하였다.
1915년 제철소 건설공사에 착수했으며, 1917년 제철소 완공에 즈음하여 미쓰비시제철주식회사를 별도 계열사로 설립하여 제철소 경영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1918년 6월 제1용광로의 가동을 시작으로 제철소 조업이 개시되었고, 8월에는 제2용광로가 가동하였다. 주요 설비는 철광석으로부터 선철을 뽑아내는 제선용(製銑用) 용광로(高爐) 2기(150톤급), 그리고 생산된 선철을 원료로 강재를 생산하는 제강용(製鋼用) 평로(平爐) 2기(50톤급), 기타 압연설비 등이었다.
초창기 조업은 순탄하였으나, 1921년 11월 워싱턴군축회의에 의해 일본해군의 군축 방침이 결정되면서 강재 수요가 위축되자 생산에 타격을 받았다. 결국 1922년 4월부터 강재 생산을 중단하고 선철만을 생산하였는데 생산량은 1929년 현재 15만 톤 정도였다. 선철 생산은 이후 점차 증가하여 1941년 30만 톤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중단된 강재 생산을 다시 시작한 것은 1934년 일제가 국내 제철사업 합동 정책에 따라 국책회사인 일본제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겸이포제철소가 그 산하의 분공장이 되면서부터였다. 시설 확충을 통해 1934년부터 강재 생산을 시작하였는데 강판(鋼板)과 형강(形鋼)이 주요 생산품이었다. 생산량은 1934년 2만 톤에서 1943년 11만 톤으로 최고 생산량을 기록하였다.
겸이포제철소는 미쓰비시재벌의 주력 제철소로, 초창기에는 미쓰비시중공업에 조선용 강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생산된 강판과 형강의 품질은 일본 제철소들과 비교해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造船)에 사용되는 강재는 선박의 안전성 등을 이유로 일정한 기준이 요구되었던 까닭에, 건설용 등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고급 강재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기에는 전쟁 수행을 위한 해상 수송력 확충을 목적으로 선박 대량 건조가 ‘전시계획조선(戰時計劃造船)’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일본 해군성이 주도하는 이 계획에 겸이포제철소는 조선용 강재를 조달하는 일본 국내외 주요 공장 12개에 포함된 핵심 군수공장이었다. 해군성은 강재 생산의 독려를 위해 강재 감독관을 파견하여 직접 생산을 통제하였다.
현재는 황해제철연합기업소(黃海製鐵聯合企業所)로 북한의 주력 제철소이다.
겸이포제철소는 비록 일제강점기 일본 재벌기업의 진출에 의해 건설되었고, 당시 한국 경제와의 관계성보다는 주변 철광석 부존에 착목한 것이었지만, 한국 최초의 근대식 제철소였다.
또한 중간재인 선철부터 완성품인 강재까지를 연속된 생산과정 속에서 한 번에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 ‘선강일관체철소(銑鋼一貫製鉄所)’였다. 오늘날의 종합 제철소와 같은 위상을 가진 일제강점기 유일한 제철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