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방직주식회사 ()

근대사
단체
1919년 김성수(金性洙)를 중심으로 한국인 자산가들이 결집하여 설립한 면방직 회사.
이칭
이칭
(주)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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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경성방직주식회사는 1919년 김성수를 중심으로 한국인 자산가들이 결집하여 설립한 면방직 회사이다. 조선 경제의 부흥과 자립을 표방하며 생필품인 면직물을 국내에서 생산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920년에 자본금 100만 원으로 영등포에 공장부지 5,000평을 구입하여 공장 건설에 착수하여 1923년 완공되었다. 초창기 경영난을 극복하고 1930년부터 공장을 증축하고 만주에 남만방적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 민족정서를 경영자원으로 성장한 민족계 대기업이라는 평가와 함께 식민지 권력과의 유착 및 전시체제기의 협력 등에 대한 비판도 받고 있다.

정의
1919년 김성수(金性洙)를 중심으로 한국인 자산가들이 결집하여 설립한 면방직 회사.
설립목적

일본산 수입 면직물과 일본 면방직 자본의 진출에 대항하여 민족적 근대 기업의 설립을 통해 조선 경제의 부흥과 자립을 표방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인 면직물의 국내 생산을 통해 일본산 제품을 구축하고, 수입 대체를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경성방직은 이를 위해 제직(製織), 방직(紡織), 기타 매매 및 이와 관련된 제반 업무를 영업 목표로 삼았다.

연원 및 변천

1919년 10월 5일 설립되었으며, 사장은 박영효(朴泳孝), 자본금은 100만 원[최초 불입자본금은 25만 원]이었다. 1920년 3월 영등포에 공장부지 5,000평을 구입하여 본사 사옥 및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주요 설비인 방직기는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도요타(豊田)자동방직기제작소에서 직기 100대를 수입하여 설치하였고, 원료인 면사(綿絲) 역시 오사카(大阪)의 도매상 야기(八木)상점과 공급 계약을 체결하여 조달 받았다. 1923년 1월 공장이 완공되어 일부 가동에 들어갔고, 4월에는 최초 광목 제품이 출하되었다. 9월부터는 공장을 완전 가동하여 본격적인 조업을 개시하였다.

초창기 기술력이 떨어지는 신생 기업으로서 일본 면방 대기업 제품들과 경쟁하는 것은 쉽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민족주의에의 호소만으로 열세를 만회하기 힘들었으며, 대규모 면방직 공장이라는 근대적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상의 미숙함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초창기 경영난은 2차 자본금 불입 단행, 조선식산은행 차입금, 조선총독부 보조금 지원을 통해 대응하였으나, 장기 불황이 지속된 1920년대 상황에서 획기적 국면 전환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경영이 호전되고, 본격적이 성장에 들어간 것은 1930년대에 진입하면서부터였다. 1930년부터 시작된 영등포 공장의 증축이 1933년 완공되어 총 672대의 직기를 보유하게 되었고, 공칭자본금 100만 원에 대한 불입도 완료되었다.

1935년에는 2대 사장으로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金秊洙)가 취임하여 방적시설의 설치를 결정하였다. 이와 함께 증자도 단행하여 자본금은 기존 100만 원에서 300만 원으로 확대되었다. 1936년에는 만주 시장에 진출하여 영업망을 구축했고, 1939년에는 만주 현지에 자본금 1000만 원의 남만방적주식회사 설립을 결정, 이듬해인 1940년 공장 건설 공사가 착공되었다.

일제말 전시통제경제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도 경성방직의 규모 확장은 지속되어 1943년 영등포 공장의 증설, 삼성면업(三盛綿業) 인수, 평양조면공장 설립이 이루어졌다. 1944년에는 기존 면방직업 외에 고무공장, 피복공장, 제사 및 견직공장을 설치하여 연관 업종에 대한 확장도 실시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성방직은 식민지 치하에서 한국인 자산가들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모아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계 기업으로서, 국내 면방직업계 대기업 중 한국인이 경영한 유일한 기업이었다. 민족정서를 경영자원으로 적극 활용하여 일본 면방직 대자본이 국내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 후발 주자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를 통해 해방 직전에는 면사와 면포를 생산하는 주력 공장인 영등포 공장을 위시하여 남천 · 은율 · 평양의 3개 조면 공장, 의정부의 제사 및 견직공장, 양평동의 고무공장, 쌍림동의 봉제공장, 시흥의 염색가공 공장, 그리고 만주에 자본금 1000만 원의 남만방적을 자회사로 거느린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지위는 해방 후에도 이어져서 현재 (주)경방이라는 이름으로 경영을 지속하고 있으며, 여전히 한국 섬유 산업계에서 중견 기업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경성방직은 굴곡 많은 20세기 한국 근대화 100년을 함께 한 대표적 기업 중 하나이다. 물론 일제시기 성장 과정에서 드러나는 식민지 권력과의 유착, 전시체제기의 협력 등도 함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제국의 후예: 고창 김씨가와 한국 자본주의 식민지 기원 1876-1945』(카터 에커트, 푸른역사, 2008)
『대군의 척후: 일제하의 경성방직과 김성수·김연수』(주익종, 푸른역사, 1993)
「식민지기 경성방직의 경영사적 연구: 초기경영(1919~26)을 중심으로」(정안기,『아세아연구』 49-4,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06)
경방(www.kyungbang.co.kr/)
집필자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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