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

김연수
김연수
경제
인물
일제강점기 경성방직 사장, 삼양사 사장, 한국경제협의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수당(秀堂)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6년(고종 33) 8월 25일
사망 연도
1979년 12월 4일
본관
울산(蔚山)
출생지
전라북도 고창
내용 요약

김연수는 일제강점기 경성방직 사장, 삼양사 사장, 한국경제협의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6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에서 출생했다. 1924년 집안 소유의 여러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삼수사를 세웠다. 1931년 삼수사를 삼양사로 개칭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삼양사·경성방직 사장,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1940년대에는 언론에 학도지원병을 고무하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실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경제협의회 초대 회장, 삼양사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정의
일제강점기 경성방직 사장, 삼양사 사장, 한국경제협의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한 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96년 8월 25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울산(蔚山), 아명은 판흥(判興), 호는 수당(秀堂)이다. 아버지는 호남의 거부인 김경중(金暻中)이며 어머니는 장흥고씨이다. 형 김성수(金性洙)는 어려서 큰아버지인 김기중(金祺中)에게 입양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삼양사경성방직 사장,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경제협의회 초대회장, 삼양사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1979년 12월 4일 사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2년부터 향리에서 서당을 다니다 1907년 아버지 김경중이 고향 줄포에 세운 영신학교(永信學校)에 들어갔다. 형 김성수와 송진우가 유학을 권유하고 부모를 설득한 덕분에 1911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해 4월 도쿄 아사부중학교[麻布中學校]에 입학해서 1916년 3월 졸업했다. 1916년 9월 교토의 명문학교인 제삼고등학교(第三高等學校)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그만두었다. 1918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선과(選科, 청강생)로 수학하다가 고등학교 검정시험을 거쳐 1920년 본과로 편입하였으며, 1921년 3월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20년 7월 재일조선인 유학생으로 조직된 학우회 순회강연에 참여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1921년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 9월 평양부가 주관하는 만주시찰단원으로 만주를 방문했다. 1922년 4월에 형 김성수가 경영하던 경성방직에서 상무이사 겸 지배인, 그리고 경성직뉴(京城織紐)주식회사의 전무로 취임했다. 그해 가을부터 경성직뉴주식회사를 고무공업회사로 개편하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1925년 경성직뉴주식회사를 고무신 제조회사인 중앙상공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이사와 사장을 맡았다.

한편 1923년에 장성농장을 설립하는 등 지주 경영을 농장 형태로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24년 집안 소유의 여러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주1를 세우고 1931년까지 장성농장, 줄포농장, 고창농장, 명고농장, 신태인농장, 법성농장, 영광농장 등 모두 7개 농장을 창설했다.

아울러 조선총독부의 권유에 따라,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심원면 및 해리면 일대를 간척해서 손불농장 390정보과 해리농장 320정보의 간척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1927년에는 서울에 총괄사무소를 차려 이를 관리했다. 1931년 삼수사를 삼양사(三養社)로 개칭했다.

1927년 경영난에 빠진 해동은행을 인수하고 1937년까지 해동은행 전무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8년 조선식산은행이 설립한 조선식산조성재단 평의원, 조선비행학교 발기인,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 상담역으로 위촉되었다. 1929년 6월 조선식산은행이 대주주로 조선저축은행을 설립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1942년까지 감사로 활동했다. 해동은행 및 식산은행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1930년부터 1934년 사이에 경성방직 설비 규모를 3배로 확장할 때 이 두 은행에서 주로 자금을 차입했다.

1929년부터 1944년까지 김성수가 설립한 재단법인 중앙학원 이사로 참여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0년 4월 관선 경기도 도평의회원에 임명되었으나 고사했다. 조선공업협회에서 1930년부터 1933년 5월까지 평의원, 이후 1942년까지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1932년 7월 만몽박람회 상담역을 맡았고 12월 조선신탁주식회사 감사역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3월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회에 2만원을 기부했다.

1934년 삼양사를 합자회사로 변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1935년 경성방직 제2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 1934년부터 경성방직 사업을 더 확장하여 방적공장을 건설하고, 1936년 8월부터 제품을 생산했다. 사업을 확장하면서 각종 조선총독부 조직에 참여하고 성금을 헌납했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 경기도가 사상 선도와 사상범의 전향 지도를 목적으로 조직한 소도회(昭道會) 상무이사, 1936년 10월 조선총독부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또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석유회사 이사로 참여했다. 1937년 6월 조선실업구락부 감사, 8월 경기도 산업조사회 위원을 역임했다. 같은 해 7월 경성부에 국방헌금 1만 5,000원, 황군위문금 5,000원을 헌납했다. 1937년 9월 경기도애국기헌납발기회에 참여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조선직물협회 부회장 겸 이사로 재임했다.

1938년 8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조선총독부 물가위원회 위원, 9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8년 11월 만주 펑텐[奉天] 동광중학교에 1만원과 경성군사후원연맹에 3,000원, 12월에는 일본 해군에 1만원을 기부했다. 1939년 2월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 이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4월 조선중앙방공위원회 임시위원, 6월 경성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7월 배영(排英)동지회 상담역, 11월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위원, 12월 동아산업진흥무역회사의 창립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인 1939년 육영사업 목적으로 34만원을 출연하여 재단법인 양영회(養英會)를 만들었다. 10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사업자금으로 3만원을 헌납했고, 12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박물관 건설비로 1만원을 냈다. 그 대가로 1940년 9월과 1942년 3월 2회에 걸쳐 일본 정부가 주는 감수포장(紺綬襃章)을 받았다.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수립 이후 만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34년 9월 경성방직 만주 펑텐출장소, 1936년 삼양사 만주 펑텐출장소를 설치했다. 이와 함께 잉커우[營口]에 천일농장, 지린[吉林]에 반석농장 등 만주 여러 곳에 농장을 개설했다. 1936년 만주국에 방적회사 설립원을 제출하여 1937년 9월 허가를 받았다. 1939년 12월 펑텐 남쪽에 자본금 1,000만원의 남만방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40년 2월 조선총독부에 재중(在中) 조선인 자제교육비로 10만원을 기부했고, 만주 펑텐 동광중학교 재단이사장에 취임했다.

1940년 3월 만주 하얼빈[哈爾濱] 오리엔탈비어회사를 인수했다. 같은 해 4월 공학박사 이승기(李升基)에게 1만원 상당의 자재를 기부하고 6월 경성통제협력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1940년 9월 선만척식회사가 주최한 ‘만주개척민의 밤’ 행사에서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수립을 찬양했다. 같은 해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국토계획위원회 위원, 조선방적공업조합 이사장에 위촉되었다. 1941년에는 1월 부여신궁 근로봉사대로 참여하고 3월 선만척식주식회사 감사가 되었다.

1942년 5월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로 임명되어 해방 때까지 매년 1,800∼2,400원의 수당을 받았다. 8월 결성된 전쟁협력단체 흥아보국단의 상임준비위원, 9월 임전대책협력회의 채권가두판매대 본정대, 9월 조선임전보국단 준비위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지역 담당으로 지방유력자를 참여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임전보국단 운동자금으로 박흥식, 민규식과 함께 20만원을 출연했고 10월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되자 상무이사로 선임되었다. 11월에는 경성상공회의소 의원, 조선동아구락부에 참여(參與)로 활동했고 조선방송협회 상무이사, 재단법인 다산육영회 이사를 맡았다.

1942년 1월 4일 일본군의 마닐라 함락을 기념하여 삼양사 4만원, 경성방직 4만원, 중앙상공주식회사 1만 5천원, 삼양상사주식회사 5천원 등 10만원을 모아서 국방자재비로 조선군사령부와 해군무관부에 각각 5만원씩 기부했다. 같은 해 6월 매일신보사가 일본군에게 일장기 부채를 보내자는 운동을 벌이자 부채 2천 개를 보냈다.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후생부장에 선임되었다. 이외에 조선마사회 평의원, 매일신보 상임이사를 지냈다.

1943년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징병기념사업 실행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11월 최남선, 고원훈과 함께 일본에 가서 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촉구했다. 1944년 4월 경성에 사는 지주들이 조직한 농본회(農本會) 상담역을 맡았다. 11월에는 징병제와 학도지원병 실시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조선군참모장이 감사장을 주었다. 1945년 1월 전쟁협력단체 대화(大和)동맹을 발기했다.

1940년대 학도지원병을 고무하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했다. 대표적으로 언론에 「장사(將士)의 노고를 연모함」(『총동원』 1940.1.), 「1억1심(一億一心) 매진」(『매일신보』 1941.1.4.), 「좀 더 모시고 싶었다」(『매일신보』 1942.5.30.)라는 글을 실었다.

해방 이후 경성방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의 매제 김용완이 경성방직(경방으로 개명)을 이어받았다. 삼양사 경영에 전력을 기울여 1947년 소유한 간척지 중 380정보를 염전으로 전환하여 삼양염업사를 설립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8월 무죄를 언도받았다. 1950년 1월 적십자 특별유공회원으로 위촉되었다.

1953년 부산에서 삼양통상주식회사를 설립해 무역을 하는 한편 경상남도 울산항 해안 12만 평을 매립했다. 이 부지에 1955년 12월 제당공장 및 1957년 과학한천공장을 준공했다. 1958년과 1961년 전라남도 목포여수에 각각 급속냉동 · 제빙공장을 설립했다.

1961년 한국경제협의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초대회장에 선임되었다. 1963년에는 전주방직을 인수하여 삼양모방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68년 삼양사 주식을 상장하여 기업공개를 하고 수당(秀堂)장학회를 설립했다. 1969년에는 화학섬유산업에 참여하여 전주에 폴리에스테르 화학섬유 공장을 세웠다. 1975년 삼양사 명예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김연수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 · 11 · 13 · 14 · 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82∼36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1년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197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파 99인: 분야별 주요인물의 친일 이력서』(반민족문제연구소, 돌베개, 1993)
『재계회고』1(한국일보사출판국, 1981)
『삼양 50년: 1924-1974』(삼양사, 1974)
『동아일보』(1950.1.15; 1971.10.16.)
『매일신보』(1929.5.8; 1970.2.24; 1974.9.30; 1975.10.2; 1990.10.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주석
주1

삼양사의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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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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