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사령부는 1918년 한반도 주둔 일본 육군 부대를 총지휘하는 천황 직할의 지역사령부이다. 일본이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고 러시아군에 대한 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편성한 상주부대이다. 함경북도 나남에 사령부가 있는 제19사단을 먼저 편성하고, 용산에 사령부가 있는 제20사단을 편성하였다. 일본에서 병력까지 지원받아 3·1운동을 진압하였으며 만주의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간도를 침략하였다. 1945년에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육군을 개편할 때 조선군관사령부로 개편되어 미군을 상대하는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고 러시아군에 대한 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선에 상주(常駐)하는 부대가 필요하다고 보고 조선군을 편성하였다.
조선군은 용산에 사령부가 있는 제20사단과 함경북도 나남에 사령부를 두고 러시아군(소련군)과 직접 대면한 제19사단이란 상주부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외에도 산하에 조선헌병대, 진해만요새사령부, 영흥만중포병대대, 영흥만요새사령부, 조선군 군악대, 조선군 창고, 조선위수병원, 조선위수감옥을 직접 관할하였다. 조선군의 사령부는 1918년 6월에 편성되었다.
조선군은 1945년 2월 미군의 진격에 대비하여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육군 전체를 개편할 때 작전 부대인 제17방면군과 병참 등을 지원하는 조선군관구사령부로 개편되었다. 이때부터 조선군은 한반도에서의 치안을 유지하는 기본 임무를 그대로 유지했지만, 또 하나의 기본 임무인 소련군에 대한 작전 대신에 미군을 상대하는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한국주차군(1904∼1910), 조선주차군(1910∼1918), 조선군(1918∼1945.2), 제17방면군(1945.2∼1945.8)으로 바뀌어 갔다. 조선군은 1916년 일본 제국의회에서 한반도에 군대를 상주시키기로 결정하면서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대체로 본토의 부대들과 2년마다 교체되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부대를 정기적으로 교체하는 경우와 상주하는 경우를 각각 구분하기 위하여 전자를 주차(駐箚)군, 후자를 주둔(駐屯)군이라 불렀다.
조선군사령부는 제19사단의 편성을 먼저 완료하고, 이어 제20사단을 편성하는 도중에 조선인의 대규모 독립만세시위였던 3 · 1운동에 직면하였다. 조선군은 일본에서 병력까지 지원받아 조선인의 만세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일본은 3 · 1운동을 진압한 이후 조선의 통치방식을 무단통치에서 ‘점진적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한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조선군도 첫째, 조선총독에게서 출동명령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조선총독은 조선군사령관에게 병력 출동을 요청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둘째,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전환함에 따라 조선군 소속의 헌병도 군사경찰로서의 임무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대폭 축소된 헌병대에 근무한 조선인과 일본인은 대부분 경찰이 되었다. 셋째, 그래서 국경 감시 및 통제 업무도 경찰로 이양되었다. 대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비할 국경수비대를 편성하고 정원을 늘렸다. 특히 만주지역 한인 사회의 중심지인 동만주 지역과 소련에 인접해 있는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에 더 집중 배치하였다.
조선군은 3 · 1운동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의 무장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선의 치안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간도를 침략하였다. 하지만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에 패배하였다. 대신에 독립군을 도와주었다는 명분 등을 내세워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하였다.(경신년대학살, 간도참변)
조선군은 1924년 이후 중국 정세가 급변하여 장개석이 반군벌, 반제국주의를 내세우며 남쪽에서부터 북경을 향해 진격하는 북벌을 개시하자, 일본정부의 지시에 따라 중국 산동(山東)지방에 있던 일본의 권익을 지키고자 그곳을 침략하였다.
조선군은 1931년 9월 만주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이 중앙정부의 지시에 아랑곳하지 않고 만주를 침략하자 여기에 호응하여 독단으로 부대를 만주로 파견하였다. 만주침략 이후에도 동만주지역에서 조선인의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이곳에 다시 침략하여 항일운동 세력을 탄압하였다.
이처럼 중국문제에 적극 개입했던 조선군도 일본이 침략하는 지역에 따라 병력 파견에 원칙이 있었다. 북경 이북 지역과 만주의 남만주지역에 출동한 부대는 제20사단이었다. 동만주지역에 출동한 부대는 제19사단이었다. 제19사단은 소련 국경과 직접 인접하고 있어 그 일대의 중국문제에만 개입한 것이다.
조선군은 1937년 중국에 있던 일본군이 대륙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는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이번에도 제20사단을 북경 일대에 파견하였다. 한편으로 조선을 총동원체제로 변모시켜 오로지 조선사회를 전쟁에 동원하고 조선인이 천황에 충성하는 사회로 바뀌기 위해 적극 활동하였다. 관제 총동원 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7), 국민총력조선연맹(1940.10)에도 군 장교들이 간부로 취임하였다. 조선총독부 과장급도 참여하는 군수동원협의회를 운영하며 총동원을 독려하였다.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기구인 기획원의 책임자와 부하직원은 모두 조선군과 해군 장교로 채워졌다.
1941년 12월 일본의 침략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조선군은 1942년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작전구역으로 하는 제30사단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전황이 점차 불리해지자, 1942년 제20사단을 뉴기니아 방면으로, 제30사단을 1944년 5월 필리핀 민다나오섬으로, 1944년 2월에 편성된 제49사단을 6월에 버어마전선으로, 1944년 11월제19사단을 필리핀전선으로 각각 이동시켰다.
조선군은 일본군 전체가 병력 부족에 시달리자 1923년 12월 2일부터 1924년 12월 1일 사이에 태어나 1943년 12월 1일부터 1944년 11월 30일까지 만20세가 된 사람을 대상으로 1944년 4월부터 8월 20일까지 징병검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1924년 12월 2일부터 1925년 12월 1일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대상으로 1945년 2월부터 5월 사이에 두 번째 징병검사를 실시하였다. 이들 가운데 갑종 판정을 받은 사람들 11만여 명을 현역으로 일본군에 동원하였다.
조선군은 한반도의 치안을 유지하고 조선총독부의 통치행위가 조선인 한사람 한사람에게까지 미치도록 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조선군은 북경과 그 이북지역으로부터 소련의 블라디보스톡까지를 작전 구역으로 하는 일본군의 지역 부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