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성동구, 남쪽은 한강을 경계로 동작구 · 서초구, 서쪽은 마포구, 북쪽은 중구와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6°56'~127°00', 북위 37°35'~37°38'이다. 면적은 21.87㎢이고, 인구는 23만 622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6개 행정동(36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다.
남산의 연봉(連峰)에서 남서쪽 사면과 산록을 차지하며 남쪽으로 한강에 이르고, 남산 주변을 제외한 대부분이 해발 50m 이내의 낮은 평지를 이룬다. 남산은 화강암으로 된 잔구로서 서쪽의 효창운동장 뒷산과 마주하며, 이 사이를 만초천(蔓草川)이 남류하면서 하구에 소규모의 삼각주를 형성했으나 현재는 부지로 조성되어 있다. 제방이 없었던 일제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한강이 범람했을 때는 물이 신계동과 삼각지까지 미쳤고, 하안에는 이촌동의 넓은 범람원이 퇴적되어 한강 백사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용산 일대는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의 경기편마암복합체로 되어 있으며, 북동부 일부에 쥐라기 대보화강암이 분포한다. 한강 연안에 제4기 충적층이 동서로 길게 분포되어 있다.
용산구의 북쪽은 남산이 있어 그 지맥인 둔지산 줄기가 구의 중앙을 지나며, 응봉 줄기가 구의 동쪽에서 성동구와 경계선이 되고, 서쪽으로는 마포구와 경계를 이루는 용산 줄기가 뻗어 있다. 그 사이에 만초천이 흘러 한강으로 유입된다. 따라서 한강이 구의 남쪽 경계를 이루며 둔치에 백사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용산강 · 노량진 · 서빙고나루 · 한강진 등의 포구가 발달하였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도시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3.3℃, 1월 평균기온은 -1.5℃, 8월 평균기온은 26.1℃, 연 강수량은 1,449.1㎜이다.
용산구 지역에서 선사문화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한강변의 암사동 유적 · 응봉 유적 등을 통하여 볼 때 한강변의 용산구 일대에도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을 개연성은 높다. 용산구를 포함한 한강 유역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과 삼한사회의 마한(馬韓) 그리고 초기 백제였다. 기원전 1세기 말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가 되었다. 이들은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생산 활동과 인구 증가를 이루었고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475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남평양이 설치되었다.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래 신라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전국에 9주를 설치했고 용산구를 포함한 서울지방은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용산 지역을 포함한 서울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면서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의 활동으로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주 · 군 · 현를 개칭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楊州)로 편제되었으며, 용산 지역은 양주 관할구역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도제(道制)가 실시되어 양주는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고 절도사가 배치되어 좌신책군(左神策軍)이 되었다. 현종 9년에 양주는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고, 1067년(문종 21) 양주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고려 삼경제의 하나로 운영되었으며, 1069년에 신경기(新京畿)에 편입되었다. 그 후 다시 양주가 되었다가 1101년(숙종 6) 남경개창도감이 설치되어 남경후보지를 물색할 때 한강 연안의 용산방면을 비롯한 동대문 밖의 노원역, 도봉산 아래 해촌방면, 삼각산 면악 남쪽 지역 등이 거론되었다. 이중 경복궁 부근 면악 남쪽으로 결정이 되어 연흥전 · 천수전 등의 궁궐 건물이 마련되었다. 이때 남경의 관할구역은 동서로는 대봉에서 안산에 이르고, 남북으로는 사리에서 북악산에 이르는 지역으로, 바로 사리 일대가 용산 한강변이었다. 한편 1284년(충렬왕 10) 과주의 용산처를 부원현으로 승격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언제부터인가 용산 지역이 남경으로부터 과주로 이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1298년(충렬왕 34) 남경을 한양부로 격하시키면서 나타나는 고려 한양부 소속의 고봉현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1394년(태조 3) 한양천도로 한성부 관할구역이 될 때까지는 과주 부원현 용산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경기좌도에 속하여 과전과 공신전의 반급지역이 되었다.
용산 지역에는 고려시대 지방을 잇는 22도의 하나인 청교도(靑郊道)의 한 역으로 청파역(靑波驛)이 있었는데, 이 역은 한성과 삼남지방을 잇는 역이었다. 또 충숙왕은 제국대장공주와 함께 용산강에 행차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었고, 행궁에서 용산원자(龍山元子)를 낳기도 하였다. 한편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지방으로 피난갈 때 이곳 한강변 나루인 사평도를 건너기도 하였다.
용산은 고려 말 과주(果州)에 속했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으로 서부의 용산방(龍山坊)이었다. 한편 오늘날 용산구 지역은 용산방과 더불어 남부 한강방과 둔지방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 용산방에는 마포구지역도 포함된다. 1789년 용산 지역에 해당하는 용산방 · 한강방 · 둔지방의 호구를 살펴보면, 용산방은 4647호에 1만 4915명, 한강방은 406호에 1145명, 둔지방은 1,241호에 3,589명으로 한성부 인구의 약 20만 명의 1할에 해당하는 인구가 분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76년(성종 7) 용산강 북쪽 언덕 귀후서 뒤편의 폐사지를 중수하여 용호독서당을 개설하고 사가독서를 실시하여 홍문관 학사들을 공부하게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퇴각을 차단하는 전장이었으며, 원효로 심원정을 회담장소로 하여 조선측을 외면한 채 명나라 군사와 왜군이 화전교섭을 벌이기도 하였고, 용산강에서 강화회담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용산강은 조선 초기 수로전운소가 설치되는 등 한강수운의 중심지였으며, 후기에는 마포에 그 기능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효창공원 일대는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효창원이 마련되어 왕실묘역으로 이용되었으며, 한강변 서부이촌동 모래사장은 새남터라 하여 군사 연무장과 사형장으로 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와서 · 귀후서 · 전생서 · 서빙고 등의 관아가 있었고, 청파역과 이태원, 노량진 · 서빙고나루터 · 한강진이 있어 주요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용산구는 1896년 4월 한성부 용산방 · 한강방 · 둔지방으로 시작하여 1910년 10월 경기도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1911년 4월 5부 8면제 실시에 따라 용산면 · 한지면이 되었다. 1914년 4월에는 용강면 · 한지면이 경기도 고양군에 속하였다. 그러나 업무처리 곤란과 주민의 불편에 따라 1914년 9월 다시 경성부 용산출장소를 설치하고 용산일대를 관할하게 하였다. 1931년 경성부 직할이 되었으며, 그 후 경성부의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고 주거지역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경성부 본청 행정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43년 6월 ‘구제’를 실시, 행정기관으로 용산구역소를 설치하고 ‘구장’이 관할하게 되었다.
원효로 방면을 구용산, 한강로변을 신용산이라 부르는데, 구용산은 조선 말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다툼 무대였고, 각국 인들의 거류지로 조성되어 지금도 효창 · 청파동과 원효로 등지에는 일본식 목조의 낡은 가옥이 남아 있다. 즉 1884년(고종 21) 10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된 후, 1887년 선교의 자유가 인정되자 원효로를 중심으로 프랑스 · 중국 · 일본인 등이 들어와 종교 및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역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신용산 지역은 조선시대까지 홍수피해가 잦아 낮은 지대에는 인가가 거의 없는 벌판이었다. 그러나 도심과 가깝고 한강 수운을 이용해 인천과의 연결이 용이하며 평탄하고 넓은 이 지역은 일제의 식민통치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
1888년 8월 한강에 증기선이 운항되었고,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이자 양옥건물인 용산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00년 1월 서계동청파동원효로4가에 이르는 전차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와 철도기지가 세워져 식민통치와 대륙침략의 거점이 되었다.
광복 후 서울특별시 용산구가 되었으며, 현재 36개 법정동과 16개 행정동으로 구획되어 있다. 그간 경제발전과 인구변동 등으로 여러 차례 관할 구역의 조정이 있었으며, 1995년 7월 1일 민선 제1기 출범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었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일본군이 주둔했던 신용산 지역에는 자연스레 한국군과 미국군의 사령탑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2006년 들어 미군기지의 이전과 더불어 민족공원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육군본부 이전 자리에는 전쟁기념관이 조성되었고, 용산가족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건립되어 있다. 또 미국대사관의 이전 결정과 초고층 아파트의 건립으로 이 일대의 경관이 크게 변모되고 있다. 최근 들어 용산 지역에 대한 개발 잠재력에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의욕적인 지역 개발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용산 일대는 철도시설과 군사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반면 용산동2가는 흔히 해방촌이라 부르는데 한국전쟁 전후 월남한 사람들이 집단으로 판잣집을 짓고 살던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2001년 확정된 서울특별시 지구단위 개발계획에 따라 서울역에서 한강대교에 이르는 100만 평의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용산역이 경부고속철도 중앙역사와 신공항철도 출발역으로 선정되어 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용산역 일대 철도정비창을 포함한 21만여 평이 쾌적한 환경과 업무의 편리성을 도모하고 민간 설계 공모와 외자 유치를 통해 첨단 국제 업무 단지로 조성될 계획이다. 또 한강로 일대에 최첨단 업무시설과 컨벤션센터, 외국인전용 주거시설, 공원 녹지시설 등이 2011년까지 체계적으로 개발될 것이다. 즉 주한미군이 반환하는 여러 시설부지에 관광 · 문화관련 시설과 종합행정타운이 건립되면 용산구는 명실상부한 서울의 부도심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용산구 지역에는 가봉을 비롯한 41개국의 대사관이 위치하여 한국 현대 외교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용산구에는 남산 기슭과 용산 줄기 그리고 한강과 연계된 유물유적들이 분포되어 있다. 특히 효창공원 일대는 문화유적의 연원이 깊은 곳으로 편안한 휴식공간이자 민족정기가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성역화되어 있다. 아울러 국립중앙박물관,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등에 수많은 유물 유적이 보존되어 있어, 용산구는 대한민국 역사유물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효창동과 청파2동에 서울 효창공원(사적, 1989년 지정)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원인 효창원(孝昌園)이 있던 곳이다. 아울러 정조의 후궁이며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의 묘와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의 묘 그리고 그의 딸인 영온옹주의 묘가 같이 있었으며, 이 묘원들은 광복을 전후해 고양시 서오릉으로 이장되었다. 효창원 일대는 1924년 공원용지로 책정되어 1940년 정식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일제 때 항일투쟁을 하다 목숨을 바친 윤봉길 · 이봉창 · 백정기 등 3명의 의사와 백범 김구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 · 차이석 · 조성환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또 이봉창의사 동상과 위 독립운동가 7분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가 건립되어 있으며, 백범기념사업회에서 운영하는 백범기념관이 있다.
구의 북쪽 경계가 되는 남산에는 서울 한양도성(사적, 1963년 지정)이 축조되어 있다. 서울 한양도성은 1395년 도성조축도감을 설치하여 팔도 인원 20만 명을 동원하여 축성한 약 18㎞에 달하는 도성으로 용산구 지역은 대체로 경상도 지역 주민들이 동원되어 축조되었다.
용산구는 천주교와 인연이 깊다. 1892년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서울 용산신학교(사적, 2012년 지정)와 1902년에 건립된 서울 원효로 예수성심성당(사적, 2012년 지정)이 있으며, 조선시대 말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된 이촌동의 새남 터가 있어 이 순교성지를 기념하여 천주교성당이 건립되어 있다.
청암동 한강변에는 구 용산 수위관측소(서울특별시 기념물, 2002년 지정)가 있다. 이는 1924년 한강변에 최초로 건립된 철근코크리트조 우물통 형태의 자기관측소로 1925년부터 조위와 홍수위를 관측하였다. 1925년 초부터 1976년 9월까지 줄곧 한강의 수위를 측정해왔는데, 1925년 을축년 홍수 때 수위 12.71m가 지금까지의 최고기록이라고 한다.
또 문화유적지로 군자감 터, 귀후서 터, 용호독서당 터, 서빙고 터, 심원정, 제천정 터, 전생서 터, 전환국 터, 와서 터, 이태원 터 등이 있다.
용산구의 한강변을 따라 부군당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수운의 안녕을 기원하는 민속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1973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된 서빙고동 부군당은 조선 태조 내외를 주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35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다. 그 외 향토민속문화유산으로 남이장군 사당, 김유신장군 사당(명화전), 이태원 부군당, 동빙고 부군당, 산천동 부군당, 한남동 부군당, 보광동 부군당(무후묘) 등의 부군당이 있다.
용문동 106번지 언덕에 있는 남이장군사당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서 1973년부터 남이장군 사당제를 올리고 있다. 즉 지역향토문화행사의 하나로 남이장군 대제를 거행하고 있는데, 걸립-꽃받기-당제-장군출진-당굿 순으로 진행된다. 남이장군 사당제는 1999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용산구에는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용산신학교가 설립된 이래 1913년 선린상업학교(선린정보산업고등학교), 1915년 금양소학교, 1917년 용산중학교 등이 계속 자리 잡게 됨에 따라 근대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5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10개교와 숙명여자대학교가 있다. 그리고 1922년에 경성부립도서관에서 출발한 시립남산도서관을 비롯하여, 시립용산도서관 · 철도도서관 등이 있어 사회교육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미술관,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박물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문화예술의 증진을 위한 용산문화원과 구민회관 등이 있다. 전쟁기념관에는 선열들의 호국전쟁에 관련된 자료와 한국전쟁 사료가 정리, 발굴되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이 있어 대한민국 5천년 역사의 실체를 살필 수 있다.
1998년에 개원한 용산문화원에서는 주민들의 문화 욕구를 만족시키고 향토문화의 보존 · 육성을 위해 문화예술강좌를 비롯한 각종 전시회, 음악회 등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또한 백송문화제를 개최하여 수준 높은 문화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청소년사생대회와 용산백일장과 사생대회, 문화유적탐방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구민회관은 종합복지시설로 운영되면서 전시실 · 자료실 등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지역언론기관으로 세계일보, 제일경제신문, 시정신문, 용산신문, 용산케이블TV 등이 있으며, 영화관으로는 성남극장이 있다.
용산에 가톨릭 성직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원효로 성당이 설립되었고, 현재 성심여자수도회와 성심여자고등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주문모 · 김대건 신부가 처형된 새남터와 박종원 등이 순교한 당고개 등의 천주교 순교성지가 있다. 용산 천주교회에는 초기 천주교 전래에 공헌한 뮈델 · 블랑 · 브르기네트주교 등 72기의 성직자 묘소가 있어 용산구는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 삼각지성당 등 여러 성당과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등 여러 수도회가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는 뿌리내리기 어려운 배경에도 불구하고 1912년 용산교회, 1913년 보광교회가 자리 잡게 되었고, 칼빈신학교, 대신신학교, 한국그리스도의 교회 총회신학원이 있다. 용산에서 불교는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는데, 조교종의 묘법사 · 유림사 · 보덕사 · 원효법당이 있고, 태고종의 관음사 · 만수사 · 용화사 · 금강암 등이 있다. 특히 한남동에는 1976년 이슬람교의 한국무슬림 중앙성원이 준공되어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또 원불교는 일본인 사찰 용광사를 인수하여 만든 서울교당과 원효교당이 있다. 그리고 통일교의 본부교회가 청파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일본계 천리교의 총본산도 청파동에 있다.
용산구의 대표적인 전시관으로 전쟁기념관이 있다. 실내전시와 옥외전시시설로 되어 있으며, 무려 1만 3600여 점의 전쟁사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실내전시실은 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한국전쟁실, 월남해외파병실, 국군발전실, 대형장비실 및 방산장비 전시공간 등 7개 전시실로 구분되어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호국자료가 입체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실외전시장에는 한국전쟁 당시 장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대형 무기가 전시되어 있으며, 축소모형무기전시장에는 육해공군의 주요무기가 축소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또 용산구에는 2005년 새롭게 개관한 대한민국 박물관의 모체인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다. 5천년 한민족사를 한 공간에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전통문화의 심층 조사연구와 국제문화교류의 장이 되고 있는 문화의 전당이다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은 한국 여성생활사와 일반 민속학 자료 4,000여 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숙명여자대학교문신미술관은 조각가 문신의 작품 12점 등을 야외에 전시하고 있다. 한편 남산의 서울타워에는 지구촌민속박물관이 있어 여러 민족의 생활문화를 살펴보고 체험할 수 있다. 효창공원 내에는 백범 김구선생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이 있는데, 전시홀 · 영상전시실 · 공연마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효창공원 내에는 1960년에 건립된 효창운동장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전용 운동장으로 조성되었다. 중앙의 축구장 외곽에는 육상경기트랙이 설치되어 있으며, 테니스장이 부설되어 있다. 1986년에 조성된 이촌지구 한강시민공원에는 축구장 · 농구장 · 야구장 · 롤러스케이트장 · 수영장 등의 운동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어 생활체육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 구민회관 내에 체육실 · 강당 등이 있어 복지시설로서의 심신을 단련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세시풍속은 일정한 시기에 주기적 ·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연중행사인데, 주로 명절에 따라 행해진다. 설날의 세배 · 덕담 · 성묘, 정월대보름날의 부럼 · 오곡밥 · 약밥 · 묵은나물먹기, 한식날의 사초와 성묘, 삼짇날의 답청, 초파일의 연등회, 단오날의 창포에 머리감기, 유두날의 머리감기와 시절식 먹기, 추석의 차례 · 성묘, 시월 시향 제사, 동짇날 팥죽먹기, 그믐날 폭죽와 묵은세배 등이 있다.
옛날 용문동에는 체구가 당당한 장사들이 많이 살았는데, 매년 정월 초에 만리현에서 석전(石戰)을 벌일 때 크게 활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설날의 윷놀이 · 널뛰기 · 연날리기, 정월대보름날의 불놀이 · 지신밟기, 삼짇날의 화전놀이, 초파일의 관등놀이 · 탑돌이, 단오날의 그네뛰기 · 씨름, 추석의 강강술래 · 거북놀이 · 소놀이, 중양절의 단풍놀이 등이 행해졌다.
민간에 길흉화복이 이어지면서 현생의 부귀와 저승의 편안함을 기원하는 바램은 각종 굿거리로 남아 전하고 있다. 즉 재수굿, 병굿, 내림굿, 지노귀굿, 대수대명굿, 주당맞이굿, 살풀이굿, 노망굿 등이 있다. 특히 부군당 제의에 유교풍의 제사가 끝나면 굿을 진행하는데 남이장군사당에서는 가망청배, 부정거리, 신장거리, 호구거리, 말명거리, 조상거리, 상산거리, 별상거리, 대감거리, 창부거리, 제석거리, 군웅거리, 황제푸리, 뒷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굿은 이태원부군당, 산천동부군당, 보광동부군당, 보광동무후묘, 동빙고동부군당, 서빙고동부군당 등에서도 행해지는데, 근래에는 유교식 간략하게 제의를 마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태원(梨泰院) 일대는 임진왜란 이후 외국군이 머물던 땅으로, 가슴 아픈 설화가 있다. 지금의 이태원 황학동이란 곳에 운종사(雲鐘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절에는 여승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이 운종사에 들어가서 그 절의 여승을 겁탈하고 얼마동안 머물러 지내다가 그들이 떠나갈 때 그 절을 불태워버렸다. 그 때 왜병들에게 겁탈당한 여승들은 그 후 갈 곳이 없어 융경산(隆景山) 부군당 밑에 토막을 짓고 살았는데 임신하여 아이를 낳게 되자 이웃동네 사람들이 이를 알고 그 집을 ‘이태원’(異胎院)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들이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여기에 모여 살았는데 이들을 이타인(異他人)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의 이태원으로 쓰인 것은 효종 때인데.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재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이장군사당과 관련하여 남이의 비범성에 따른 혼인설화가 전한다. 남이가 어렸을 때 거리에서 놀다가 어린 하인이 보자기에 작은 상자를 싸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위에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따라갔더니 그 하인이 권람(權擥)의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그 집에서 우는 소리가 나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그 집 낭자가 갑자기 죽었다 하였다. 이에 남이가 내가 들어가서 보면 살릴 수 있다고 하니, 한참 뒤에 허락하였다. 남이가 들어가니 낭자의 가슴을 타고 앉았던 귀신이 곧 달아나고 낭자가 일어나 앉았다. 남이가 나오니 낭자는 다시 죽었다가 남이가 들어가자 되살아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자 남이는 자기가 본 바를 이야기하고, 약으로 치료하였다. 이 일로 남이는 권람의 사위가 되었다고 한다.
도림동 일대는 인천으로 가는 길목으로 주막거리로 발전하였고, 세태를 반영하는 민요인 ‘창부타령’ 등의 경기잡가가 널리 유행된 곳으로 전한다.
조선시대 주성동에서는 솥을 만들었고, 도원동 산기슭에는 메주막이 있어 메주를 만들어 성 안에 공급하였으며, 한강로3가에는 기와공장인 와서가 있었다. 한편 한강변을 이용한 경강상인들의 상업유통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용산 지역은 본래 도심과 인접한 주거지역으로 성장해 온 이 지역은 상업활동이 활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근래 도시기능의 확산으로 종합시설물과 편의 · 위락시설이 이전됨에 따라 특히 도심과 직결되는 간선도로변에는 상업기능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용산의 경제권은 서울역에서 남영역에 이르는 권역, 삼각지에서 용산역 · 이촌동에 이르는 남부권역, 원효로 일대, 이태원 권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숙대입구 일대의 여러 학교와 학원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상권과 한남동 순천향병원 주변의 작은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그 외 서빙고동의 뉴코아백화점, 한남동의 현대시장, 후암시장, 신용산시장, 만리시장, 신흥시장 등의 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이태원관광특구는 서울의 이방지대라 불리는데 이곳 1.4㎞의 이태원로 양 길가의 구두 · 의류 · 가방 등을 파는 상가와 숙박업소 · 음식점 · 유흥오락시설과 무역상 · 여행대리점 · 관광호텔 등 2000여 개의 점포가 밀집해 있어 외국인 관광객뿐 아니라 내국인까지 유인하는 새로운 상업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한강로3가에 있던 용산청과물시장은 서울의 채소 · 과일을 공급했는데,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이 세워지면서 이전해 가고, 그 자리에는 용산전자상가단지가 들어섰다. 이곳에는 컴퓨터 · 통신기기 · 가전제품 · 조명기기 · 공구 등을 취급하는 6,000여 개 업체가 밀집해 있다. 지하철 1·4호선이 만나는 지점으로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유통기지가 되고 있다. 또 한강로2가 용산우체국에서 미군부대에 이르는 일대에는 용산보세타운이 형성되어 외국인 고객을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에 이미 수륙교통의 요충지로서 세력 확장의 쟁탈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남하하는 길목으로 그리고 한강 상류나 삼남지방을 서울의 도심과 연결시키는 하항의 관문으로 그 위치의 중요성이 컸다. 특히 1900년 이후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교통의 핵심부로 일제의 대륙침략의 발판이 되기도 했으나 이로 인해 급속히 확장되었다. 지금도 용산역 부근에는 각종 철도 관련 시설물이 집중해 있으며, 용산역은 서울 제2의 역으로서 화객(貨客)수송이 활발하다.
용산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는데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고속버스로 연결되지 않는 지방을 운행하거나 노선 도중에서도 정차하는 직행 · 완행의 장점이 있어 이용률이 높았다. 국철 경부선 · 경인선 · 경원선이 지나며 지하철 1·6호선이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뿐만 아니라 한강대교 · 한강철교를 비롯해 반포대교 · 한남대교 · 동작대교 등의 교량이 걸쳐 있어 도심의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용산구의 중심도로는 한강로이다. 서울역과 한강대교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로 동작구를 지나 경부고속도로와 1번 국도로 이어지며, 용산구를 동서로 나누는 축이 되기도 한다. 길을 따라 지하철 4호선이 지나며 서울역 · 숙대입구역 · 삼각지역 · 용산역 일대의 역세권 개발과 용산역 일대의 첨단정보단지를 아우르고 있다. 또 백범로와 이와 이어지는 이태원로는 구를 남북으로 나누는 축으로 지하철 6호선이 지나며 효창공원역 · 용산구청앞역 · 삼각지역 · 녹사평역 · 이태원역 · 한강진역 일대의 역세권을 아우르고 있다. 그 외 주요간선도로로 원효로 · 반포로 · 한남대로가 용산구를 남북으로 이어주며, 강변북로 · 서빙고로가 한강변을 따라 동서로 이어지고 있다. 그 외 남산순환도로인 소월길 · 보광동길 등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과 뒤이어 개통된 경부선이 지나고 용산역에서 호남선 열차가 출발하는 등 철도교통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지하철 1호선이 지나 인천 · 수원 · 천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서울외곽을 통하는 국철이 있고, 지하철 1·4호선이 구의 남북으로 관통하며 지하철 6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있어 철도와 함께 육상교통의 중추적 기능을 다하고 있다.
용산구의 관광자원은 남산에서 한강을 바라보는 경관과 어우러진 자연이 으뜸이다. 남산공원은 세계에서 세 번째 높은 N서울타워가 있어 수도서울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멀리 인천 앞바다에서 개성 송악산에 이르기까지 전망할 수 있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서울야경을 볼 수 있는 서울의 관광명소이다. 또 서울성곽이 지나고, 남산도서관과 역사적 위인들의 동상과 시인 김소월의 시비 등이 있는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그리고 1968년 개원한 남산식물원이 있는데, 이곳은 곧 철거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이촌 지구를 포함한 한강공원은 세계대도시에서 볼 수 없는 수려한 경관과 많은 수량을 보여주는 곳으로 어느 관광자원보다 우수한 자연경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때 거북선나루터가 있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의 전함 거북선을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제작 · 전시하여 청소년들에게 역사와 호국정신을 함양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지금은 남해로 옮겨졌다. 아울러 옛나루터에 건설된 원효대교,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동작대교, 반포대교와 잠수교, 한남대교 등은 넓은 강폭을 이어주는 경관과 더불어 야경의 아름다움은 관광자원의 질을 높여주고 있다.
1994년 육군본부 자리에 개관한 전쟁기념관은 선열들의 호국전쟁에 관한 소중한 자료와 역사적 교훈들을 발굴, 종합적 · 체계적으로 정리, 보존하고 있으며, 각종 대규모 야외행사를 개최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효창공원은 민족의 성지로 조성되어 있고, 축구전용경기장 등이 있어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방문하고 있다. 또 5천년 한민족사의 정수가 전시되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그 정원과 이어진 용산가족공원 등이 있어 1년 365일 관람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관광코스로 원효로 백송남이장군 사당효창공원숙명여대박물관전쟁기념관 코스, 원효로 백송용산신학교용산전자상가새남터성당거북선나루터 코스, 서빙고 부군당동빙고 부군당김유신장군 사당보광동 무후묘용산가족공원전쟁기념관 코스, 남산타워남산식물원남산공원안중근의사 사당~서울 한양도성 코스 등이 개발되어 있다.
관광숙박시설로 해밀턴호텔, 이태원호텔, 캐피탈호텔, 그랜드하얏트호텔, 크라운관광호텔, 가야관광호텔 등이 있으며, 관광쇼핑 장소로 이태원 관광특구와 용산전자상가가 있어 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10월 문화의 달을 전후하여 용산문화원 뒤뜰에 있는 천연기념물 백송을 보호하고 알리며, 용산구민의 문화원 준공을 기념하여 백송문화제가 열린다. 또 매년 10월 17일에 구민의 날 기념행사인 지역향토문화행사로 남이장군대제를 거행하여,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구의 서쪽에 있는 1~4가의 동이다. 원효로를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형성되었으며, 남쪽은 한강 건너 영등포구 여의도동, 동쪽은 한강로, 서쪽은 청파동 · 효창동 · 용문동 · 신창동 · 산천동 · 창암동, 북쪽은 남영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광복 직후 일제식 명칭을 고치고 우리 성현의 이름을 붙이면서 신라의 승려 원효대사(元曉大師)의 법호를 붙인 것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지역이었고, 1911년에는 경기도 용산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경성부 원정1·2·3·4정목이 되었고, 1946년 원효로1·2·3·4가로 바뀌었다.
원효로1가에는 용산경찰서가 있으며, 원효로3가에는 조선시대 군자감(軍資監)의 강감(江監)이 있었다. 체신공무원교육원, 한국통신품질보증단, 용산전자상가가 있다. 만초천이 복개된 원효로4가는 용산항(龍山港)으로 유명하였는데, 지금은 고층아파트가 건립되었으며 강변 고속화도로가 지난다. 87번지에 임진왜란 때 강화회담을 했던 심원정(心遠亭)터가 있다. 또 성심여자고등학교 경내에는 1892년에 건립된 용산신학교와 1902년에 지은 원효로성당(사적, 2012년 지정)이 있다.
구의 북쪽에 있는 동이다. 남산 정상의 서울성곽을 따라 중구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과 남쪽은 용산동2가, 서쪽은 동자동 · 갈월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남산에 있는 두텁바위, 즉 둥글고 두터운 큰 바위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이었고, 1751년(영조 27)에 한성부 남부 둔지방 전생서내계 · 외계에 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 한지면에 속하였고, 1914년 삼판통(三坂通)으로 되었다가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다. 1946년에 후암동으로 바뀌었다.
남산정상에 N서울타워 기슭에 시립남산도서관 · 용산도서관 · 독일문화원이 있으며, 남산도서관 앞에는 정약용(丁若鏞)과 이황(李滉)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남산 중턱에 남산식물원이 있다. 후암동길 서쪽에 병무청과 서울지방병무청이 있는데, 그 자리에 국방부가 있었다. 한편 도동2가 지역이 1985년 후암동으로 편입되었다. 후암동의 남산에는 서울 한양도성이 정비되어 있고, 370번지 일대에는 조선시대 국가 제사용 소 · 돼지 · 양 등을 기르던 관청인 전생서(典牲署)가 있었다. 그리고 도동 지역에는 이덕형(李德馨)이 살았고, 사축서 · 남관왕묘 등이 있었다.
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원효로3가, 남쪽은 원효로3·4가, 서쪽은 산천동(山泉洞), 북쪽은 도원동 · 용문동(龍門洞)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공물 값과 이서의 급료를 지급하던 호조의 신창인 별고(別庫)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용산방 진휼창계 · 신창내계에 속하였고, 1911년 경성부 용산면 관할이 되었다. 1914년 청수정(淸水町)이 되어 용산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로 용산구 청수정이 되었다가, 1946년 신창동이 되었다. 신창동의 행정동은 원효로2동이다.
구의 중앙에 있는 16가의 동으로 용산동의 법정동은 1가에서 6가로 나뉘어져 있다. 한강로와 반포로 사이에 위치하여 동쪽은 이태원동, 서쪽은 한강로동, 남쪽은 서빙고동, 북쪽은 후암동과 중구 예장동 · 장충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한강로 서쪽 마포구와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가 용 모습을 하고 있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이었고, 1751년(영조 27)에 한성부 남부 둔지방에 속하였으며 일제 때 경성부 한강통(漢江通), 고양군 한지면(漢芝面) 지역이 되었다가 1941년 용산정16정목이 되었다.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용산동으로 바뀌어 1가에서 6가로 분할되었다. 법정동인 용산동2·4가는 용산2가동, 용산동1가는 남영동, 용산동3·5가는 한강로2동, 용산동6가는 서빙고동에서 행정을 담당한다.
용산동1·2가는 해방촌(解放村)이라고 불리는데, 8·15광복 후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와 38선을 넘어온 월남민들이 이곳에 임시로 거주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용산동4가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군사 주둔지였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군대가, 임오군란 때에는 청나라 오장경(吳長慶)의 군사가 주둔하였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에는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이 부근에 자리잡아 일본 거류민의 집단거주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광복 후 미군이 주둔하였으며, 옛 육군본부 자리에 1994년 전쟁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용산동6가에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용산가족공원이 있다.
구의 북쪽에 있는 동으로 북쪽은 동자동(東子洞), 남쪽은 한강로1가, 동쪽은 후암동(厚岩洞) · 남영동(南營洞), 서쪽은 청파동(靑坡洞)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으로 1867년(고종 4)에 한성부 용산방에 속하였으며, 1895년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갈월리가 되었다가 1914년 경성부 강기정(岡岐町)이 되었다.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경성부 용산구 강기정이 되었다가 1946년 갈월동이 되었으며, 1977년 9월 갈월동 일부가 청파동1가에 편입되었다. 법정동인 갈월동은 남영동에서 행정 관할하고 있다. 동명은 마을에 칡이 많았다는 데서, 또는 갈월도사가 살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수도고등공민학교 · 갈월종합사회복지관 · 청소년사업관이 있으며, 지하철 1·4호선이 지난다.
구의 중앙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용산동1가, 서쪽은 청파동3가 · 원효로1가, 남쪽은 한강로1가 · 용산동1가, 북쪽은 갈월동 · 후암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서울의 남쪽인 이곳에 군영이 있었다 하여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성저십리 지역으로, 1751년(영조 27)에 한성부 남부 둔지방 이태원계의 일부였다. 1914년 경성부 한강통(漢江通)이 되었다가, 1941년에 연병정(練兵町)으로 되었다.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남영동으로 바뀌었다. 남영동은 갈월동 · 동자동 · 용산동1가와 더불어 남영동사무소에서 행정을 관할하고 있다.
한강로변에 상가가 밀집되어 있고, 지하철 1호선인 남영역과 4호선 숙대입구역이 있다. 용산동1가 지역은 대부분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옛 육군본부 자리에 전쟁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구의 북쪽에 있는 동으로 서쪽은 서계동 · 청파동1가, 남쪽은 갈월동, 동쪽은 후암동, 북쪽은 중구 남대문로5가와 접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성외지역이었으며,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서서(西署) 반석방 · 용산방, 남서 둔지방(屯芝坊)에 속하였다. 1914년 경성부의 구역 및 명칭 변경시 일본식 지명인 고시정(古市町)이 되었으며,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경성부 서대문구 고시정이 되었다가, 1946년 중구 동자동이 되었다. 1975년 용산구 동자동이 되었고, 1977년 9월 동자동 일부가 청파동1가에, 1985년 9월 도동1가가 동자동에, 1988년 1월 동자동 일부가 후암동(厚岩洞)에, 후암동 일부가 동자동에 각각 편입되었다. 동자동은 남영동사무소에서 행정을 관할하고 있다.
우리나라 철도교통의 중심으로 경인 · 경부 · 경의선의 시발역인 서울역이 있으며, 1910년 종로를 왕복하는 최초의 복선 전차가 가설된 곳이다. 휴식공간으로는 도동어린이공원과 동자공원 등이 있다.
구의 서북쪽 끝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서울역사(사적, 1981년 지정)와 동자동, 북쪽으로는 중구 만리동과 봉래동, 서쪽은 마포구 공덕동, 남쪽으로는 청파동1가와 접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반석방에 속하였으며, 18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서(西署) 용산방(龍山坊) 청파1계와 반석방(盤石坊) 석교계(石橋契)에 속하였다. 1914년 서계정이 되었다가, 1946년 서계동이 되었다. 서계동은 청파1동사무소에서 행정을 관할하고 있다.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시행되었으며, 배문중 · 고등학교와 청파공원이 위치해 있다.
구의 서쪽에 있는 1~3가의 동이다. 동쪽은 경부선 철도를 경계로 동자동 · 갈월동 · 남영동, 서쪽은 효창동과 마포구 공덕동, 남쪽은 원효로1가, 북쪽의 서계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용산 줄기를 따라 푸른 언덕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과 또 서울과 삼남 지방을 잇는 청파역이 있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배문중 · 고등학교가 자리한 지역에 연화봉(蓮花峰) · 목동산(牧童山) 등 작은 구릉과 옻나무골 등의 지명이 있어 청파의 동명을 연상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한 서부 용산방 청파계였다. 1914년 경성부 청엽정1·2·3정목이었다가, 1946년 청파동1·2·3가로 바뀌었다. 청파1동사무소에서 청파동1가와 서계동을, 청파2동사무소에서 청파동2·3가를 관할하고 있다.
1989년 사적으로 지정된 서울 효창공원의 많은 부분은 효창동에 속하지만, 공원 내 원효대사 동상이 있는 어린이 놀이터와 임시정부요인 묘소는 청파동2가에 속한다. 효창공원 북쪽의 청파동2가는 숙명여자대학교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선린중학교 · 선린정보산업고, 신광여중 · 신광여고 등이 있다. 청파로와 경부선 · 한강로 등과 이어져 지하철 1·4호선의 남영역 · 숙대입구역이 설치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산천동, 남쪽은 한강 건너 영등포구 여의도동, 북쪽으로는 마포구 도화동, 서쪽은 마포구 용강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용산방 도화동계 내동 · 외동에 해당되었다. 1910년 10월 경성부로 용산면 관할이 되었다가, 1914년 암근정(岩根町)이 되어 용산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43년 구제(區制) 실시로 용산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청암동이 되었다. 청암동은 원효로2동사무소에서 행정 관할하고 있다. 귀후서터, 용호독서당터 등이 있다.
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신창동, 남쪽으로는 원효로4가, 서쪽은 청암동과 마포구 도화동, 북쪽은 도원동으로는 마포구 도화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성저십리 지역으로 용산방 형제정계(兄弟井契), 탄항계(灘項契), 도화동외계(桃花洞外契) 등의 일부였다. 1914년 경성부 산수정(山手町)이 되었다가,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고, 1946년 산천동이 되었다. 산천동은 원효로2동사무소에서 행정 관할하고 있다. 천주교신부들의 외인묘지가 있으며, 삼오정과 산청동부군당이 있다.
구의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청파동, 서쪽의 마포구 신공덕동, 남쪽은 용문동, 북쪽의 공덕동과 접해 있으며, 동의 많은 부분이 효창공원으로 되어 있다. 동명은 조선 정조의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원(墓園)인 효창원(孝昌園)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용산방 만리창계 지역이었다. 1914년 경성부 금정(錦町)이 되었다가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고, 1946년 효창동이 되었다.
효창공원이 1924년 효창원의 일부를 공원용지로 하면서 등장하여, 1940년 정식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효창공원에는 김구묘역을 비롯한 삼의사묘 · 임시정부요인 묘소 등이 꾸며져 있고, 1960년 축구경기장이 조성되었다. 이봉창동상, 반공투사위령탑, 백범김구기념사업회 등이 있어 민족정기가 살아있는 교육현장이 되고 있다. 동의 남북으로 효창원길이 지나고, 남쪽으로는 백범로가 용산선과 평행하게 지나며,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한편 조선시대 선혜청(宣惠廳)의 별창고(別倉庫)인 만리창(萬里倉)이 있어 새창 또는 신창으로도 불렸는데, 이곳은 일제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당시 군대를 주둔하여 거점으로 삼은 곳이기도 하다.
구의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과 남쪽은 원효로동, 서쪽은 도원동, 북쪽은 효창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용산의 ‘용’ 자와 옛 지명인 동문외계(東門外契)의 ‘문’ 자를 붙인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서부 용산방 동문외계 지역이었다. 1914년 경성부 대도정(大島町)으로 되었고,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으며, 1946년 용문동으로 바뀌었다.
38번지 일대의 고급주택가는 군기창(軍器廠)으로 불리던 곳으로, 1903년 총기제조소를 세웠다가 화약고를 설치하였으며, 다시 조선서적인쇄회사가 들어섰다. 106번지 언덕에는 남이장군 사당제를 올리는 사당이 있다. 원효로와 백범로가 교차하며, 용산선 철도가 지난다.
구의 서쪽 끝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용문동, 서쪽은 마포구 도화동, 남쪽은 신창동 · 산천동, 북쪽은 효창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서부 용산방 만리창계 지역이었다. 1914년 경성부 미생정(彌生町)이 되었고, 1943년에 용산구에 편입되었으며, 1946년 도원동으로 바뀌었다. 도원동은 용문동사무소에서 관할하고 있다.
도원동은 복숭아나무가 많아 도산(桃山)이라 하였으며, 공동묘지 지역이 주택지로 변한 곳이다. 도원동의 서쪽 산을 삼선당이라고 불렀으며, 활터인 율곡정(栗谷亭)이 있었다. 성심모자원과 도원공원이 있다.
구의 서쪽에 있는 동이다. 북쪽은 문배동, 서쪽은 원효로2~3가, 남쪽은 한강로3가와 접해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서부 용산방 동문외계 지역이었다. 1910년 10월 경성부 용산면(龍山面) 관할 지역이 되었다가, 1914년 영정(榮町)이 되었고,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신계동이 되었다. 동명은 광복 후 새로 사람들이 살게 되어 생긴 동네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신계동은 한강로1동사무소에서 행정 관할하고 있다. 1번지에 있는 문배산(문평산)은 조선 후기에 처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고개마루에 당집이 있는 당고개에는 1839년(헌종 5) 을해박해 때 천주교 신자 10명이 순교한 성지이다. 신계공원이 있다.
용산구의 서쪽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한강로1가, 남쪽은 신계동, 북쪽은 남영동, 서쪽은 원효로1가와 접해 있다. 동명은 광복 후 문배산(문평산) 밑에 있다하여 붙여졌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서부 용산방 청파4계와 사거리계 지역이었다. 1910년 10월 경성부 용산면(龍山面) 관할 지역이 되었다가, 1914년 경정(京町)이 되었고,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에 문배동이 되었다. 문배동은 한강로1동사무소에서 행정 관할하고 있다. 동의 서편에 만초천이 복개되어 있으며 용호로가 지나고, 용산등기소, 동양제과㈜ 본사, 제일제당㈜이 위치해 있다.
용산구에 있는 1~3가의 동이다. 용산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은 용산동3·5가, 북쪽은 남영동과 용산동1가, 서쪽은 문배동 · 신계동 · 원효로3가, 남쪽은 이촌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한강으로 가는 주요 길목에 있어 한강통(漢江通)으로 부르던 것을 광복 후 바꾼 것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남부 둔지방 이태원계 지역이었다. 1910년 10월 경성부 용산면(龍山面) 관할 지역이 되었다가, 1914년 한강통1·2·3정목이 되었고,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한강로1·2·3가로 바뀌었다. 한강로1가는 신계동 · 문배동과 더불어 한강로제1동, 한강로2가는 용산동3·5가와 더불어 한강로2동, 한강로3가는 한강로3동사무소에서 행정 관할하고 있다.
한강로1가는 삼각지로터리를 중심으로 상가와 주택가를 이루고 있고,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이 있다. 한강로2가는 속칭 신용산 지역으로 한강로 · 용호로 · 서빙고로가 지나고, 지하철 1호선 용산역과 4호선 신용산역이 있는 교통요지이다. 용호로 주변에는 전자상가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한강로3가는 한강대교를 건너서 서울 중심가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용산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용산역 주변에는 서울우편집중국, 철도기지창, 서울철도차량본부 등 철도관계 기관들이 들어서 있으며, 용산역에서 북서쪽 관광버스터미널과 용산전자상가까지는 긴 육교가 놓여 있다. 40번지 일대에는 조선시대 처형장으로 알려진 새남터가 있다.
용산구의 서남쪽에 있는 동이다. 한강대교 북쪽 한강변에 있으며, 동쪽은 서빙고동, 서쪽은 원효로4가, 북쪽은 용산동5가 · 한강로3가동, 남쪽은 한강을 건너 동작구 노량진동 · 본동에 접해 있다. 동명은 이 지역이 모래벌판이어서 여름에 장마가 지면 홍수를 피해 강변으로 옮겨가 살았으므로 마을을 떠난다는 의미의 이촌동(移村洞)으로 불리다가 한자가 변하여 이촌동(二村洞)이 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서부 용산방 사촌리계(沙村里契) · 신촌리계(新村里契) 지역이었다. 1910년 10월 경성부 용산면(龍山面) 관할 지역이 되었다가, 1914년 이촌동, 1936년 이촌정이 되었고,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에 이촌동으로 바뀌었다.
1925년 을축년 홍수 때 나루터가 없어지는 등 큰 변화가 있었다. 한강변을 따라 강변북로와 경원선이 지나고 있다. 이촌제1동 지역을 동부이촌동이라 하는데, 이촌동길과 서빙고로가 동서로 지나고, 경원선 국철 이촌역과 지하철 4호선 이촌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한강외인아파트를 비롯해 중산층 아파트가 밀집해 있고, 한강둔치에는 시민공원이 있다.
이촌제2동 지역은 서부이촌동이라 하는데, 한강대교와 원효대교 사이에 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처형장으로 이용되는 새남터가 있으며, 지금은 순교성지로 새남터천주교회가 있다.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노들섬에는 한강에서 낙하산 훈련 중 동료를 구하고 순직한 이원등 상사의 동상이 있으며, 체육공원으로 가꾸어져 있다.
용산구의 중앙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한남동, 서쪽은 용산동2가, 남쪽은 동빙고동 · 보광동, 북쪽은 남산 능선을 경계로 중구 장충동2가와 접한다. 동명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역원(驛院)인 이태원(梨泰院)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남부 둔지방 이태원계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가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 이태원정이 되었다.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이태원동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 미군이 용산 일대에 주둔하고 외국 공관이 많이 들어서면서 값싼 제품을 살 수 있는 2,000여 개의 상가로 구성된 쇼핑거리가 형성되었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이태원관광특구로 조성되어 세계 속의 명소 이방지대로 널리 알려졌다. 이태원로를 중심으로 많은 상가와 유흥업소가 밀집해 있으며, 지하철 6호선이 지난다. 아르헨티나 · 덴마크 · 루마니아 등 많은 대사관이 있고,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며, 해밀튼호텔 · 크라운관광호텔 등이 있어 외국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동명이 유래된 이태원은 배나무가 많았던 데서 칭해진 것인데 용산고등학교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태원 마을은 남산2호터널 입구에 형성되었고, 산수가 수려한 남산 계곡에 위치하여 조선 초기부터 여행자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용산구의 동쪽에 있는 동이다. 남산의 남동쪽 기슭에 있으며, 동쪽은 응봉 줄기를 따라 성동구 옥수동, 서쪽은 이태원동 · 보광동, 남쪽은 한강을 건너 강남구 신사동과 서초구 잠원동, 북쪽은 중구 장충동2가 · 신당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동의 경계가 되는 곳에 한강과 남산이 있어 한강의 ‘한’자와 남산의 ‘남’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남부 한강방 한강계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한강리(漢江里)에 속하였다가, 1936년 경성부 한남정(漢南町)이 되었다.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다가, 1946년 한남동이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한강진에서 광희문이나 남소문으로 통하던 길이었던 한남로가 동의 남북으로 지나고 있으며, 한남대교와 남산1호터널이 연결되어 강남 · 북을 연결하는 주요간선도로가 되었다. 이태원로 · 소월길 · 독서당길 등이 지나고, 지하철 6호선이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말레이시아, 미얀마, 리비아, 모로코, 나이지리아, 방글라데시, 이탈리아, 멕시코, 이집트 등 많은 나라의 대사관과 공관이 밀집해 있고, 외국인종교휴양지, 외국인아파트 등이 있어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 외에 유엔한국대표부, 이태원하얏트호텔, 순천향병원, 서울모자보건센터, 이슬람교 중앙서원 등 많은 기관과 시설물이 있다. 한남파출소가 있던 557번지에는 한강진(漢江鎭)이 있어 상류의 송파진, 하류의 양화진과 함께 서울 도성을 지키는 구실을 하였다. 한강변에 세심대(洗心臺)가 있었고, 단국대학교 자리에는 조선시대에 화경사(華鏡寺)와 화경대라는 정자가 있었으며, 지금도 화경대고개라는 지명이 전한다.
용산구의 남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동빙고동, 서쪽은 이촌동, 북쪽은 용산동6가, 남쪽은 한강을 건너 서초구 반포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가 한강변에 두 군데 있었는데, 그 중 서쪽에 위치하여 궁중음식이나 관리에게 나누어주던 빙고가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남부 둔지방 서빙고1계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서빙고리로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 서빙고정이 되었다.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고, 1946년 서빙고동이 되었다. 서빙고동사무소에서 서빙고동 · 주성동(鑄城洞) · 동빙고동(東氷庫洞) · 용산동6가의 행정을 관할하고 있다.
서빙고동은 신동아아파트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며, 강변북로 · 서빙고로가 지나고 경원선 서빙고역이 있다. 그리고 반포대교 · 동작대교 북쪽 한강변에 위치하여 강남 · 북을 잇고 있으며, 강변은 한강공원 이촌지구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서빙고가 있던 자리는 현재 서빙고초등학교와 서빙고파출소 일대이다. 반포대교 북단에는 서빙고나루터가 있어 동작나루로 이어져 삼남지방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용산구의 남쪽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주성동 · 보광동, 서쪽은 용산동6가 · 서빙고동, 남쪽은 한강 건너 서초구 반포동, 북쪽은 이태원동 · 보광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서빙도동의 동쪽에 위치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남부 둔지방 서빙고2계였다. 1914년 고양군 한지면 동빙고리가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 동빙고정이 되었다.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고, 1946년 동빙고동이 되었다.
이태원동과 이어져 독일 · 파키스탄 · 나이지리아 · 이라크 · 쿠웨이트 · 오만 · 이란 · 폴란드 · 터어키 · 페루 · 네덜란드 · 헝가리 · 벨기에 등의 외국대사관과 공관이 있으며, 캐피탈호텔이 있어 외국인과 관광객을 많이 볼 수 있다. 강변북로와 서빙고로가 동의 남쪽을 지나며, 동빙고부군당이 있다.
용산구의 남쪽에 있는 동으로 동쪽과 북쪽은 보광동, 남쪽은 한강을 건너 서초구 반포동, 서쪽으로는 동빙고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무쇠솥을 주조하는 곳이 많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남부 한강방 주성리계였다. 1914년 고양군 한지면 주성리가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 주성정이 되었다.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고, 1946년 주성동이 되었다. 조선시대 주성동 한강가 바위에 한강수표를 표시하였다고 한다. 동의 남쪽에 강변북로와 두무개길이 지난다.
용산구의 남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한남동, 서쪽은 동빙고동, 북쪽은 한남동 · 이태원동, 남쪽은 주성동과 한강을 건너 서초구 반포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신라 진흥왕 때 보광국사(普光國師)가 세운 절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의 남부 한강방에 속하였다. 1914년 고양군 한지면 보광리가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 보광정이 되었다. 1943년 용산구에 속하였고, 1946년 보광동이 되었다.
이태원동과 이어져 알제리대사관, 국제외국인교회 등이 있어 외국인을 많이 볼 수 있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개교하여 한국전쟁 때 피난하여 이곳에 자리 잡은 오산중 · 고등학교와 서울정수(正修)기능대학 등이 있다. 보광동길이 동의 남북으로 지나면서 이태원로와 강변북로를 이어준다. 부군당이 웃당 · 아랫당 두 곳에 있는데, 이 중 웃당은 김유신장군을 모시는 사당이고, 아랫당은 제갈공명을 모시는 사당이다. 보광국사가 세웠다는 절이 조선 후기까지 있었는데, 봄 · 가을에 기우제와 국운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또 1414년(태종 14)에 설치된 우사단(雩祀壇) 터와 사충서원(四忠書院) 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