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관헌 자료에는 강무수(姜武秀)·강무수(姜武洙)·조기두(趙基斗)·김일송(金一松)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함경북도 출신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러시아 니꼴리스끄에서 관립사범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동만주 지방에서 1921년부터 소학교의 교사로 일하였다.
1924년 9월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준비위원회 즉, 오르그뷰로에서 파견한 유학생으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상해꼼그룹과 다른 꼼그룹 사이의 분쟁에 휘말려 제적된 이후 잠시 레닌그라드에 있는 국제사관양성소를 거쳐 길림성(吉林省)연길현(延吉縣)으로 돌아왔다.
연길현의 배영학교(培英學校)의 교사로 근무하며 상해꼼그룹과 연관을 맺었다. 1926년 5월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 가을 경 입당해 옹성랍자(甕聲磖子)야체이까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상해꼼그룹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특히 화요회그룹과의 갈등으로 인해 1926년 말경 상해꼼그룹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이탈할 것을 결정하자 이즈음 탈당하였다. 상해꼼그룹은 이를 계기로 재만공산주의자동맹(在滿共産主義者同盟)을 결성했는데, 이 때 공청부 책임 대리가 되었다. 1927년 8월 『동아일보』 간도지국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정치서기국의 특별 결정에 의해 조선공산당의 지부승인이 취소되자 가장 먼저 이에 대응한 꼼그룹이 상해꼼그룹과 서울청년회계 구파였다. 두 그룹은 1928년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 결성운동 때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문제가 제기되자 1929년 3월길림성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발기회’를 조직하였다. 강문수는 여기에 참가해 만주부를 조직하는 책임을 맡았다. 만주부는 1929년 9월에 조직되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1국 1당 원칙’에 입각해 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는 절차를 밟아야 하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뛰어들고자 하는 사람은 조선으로 들어가서 활동할 것을 강력히 지시하였다.
중국공산당도 1930년 들어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930년 6월경 만주부에 소속된 사람들의 다수는 만주부를 해체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로 했지만, 나머지 재건설그룹원들은 모두 조선에 들어가서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30년 8월 경 귀국, 석경덕(石景德)과 함께 부부로 위장해 과자점을 경영하는 한편, 콘푸로닥쓰회사의 직공으로 일하였다. 1930년 11월경 5개의 지역위원회로 구분되어 있던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에서 경의선위원회의 책임비서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1930년 후반 경부터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 산하에 임시로 편성되어 있던 조선국내공작위원회가 재건설그룹의 활동을 과거 파벌활동의 연장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따라 재건설그룹에서는 1931년 3월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해체하고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조직준비회를 결성하였다. 이 때 강문수는 정치부 책임자, 남조선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1931년 4월 재건설그룹에 에 대한 일제 검거 기간에 서울 용산경찰서에 체포되어 1934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전향하였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했고, 한국전쟁 때는 특무부대 장교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