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흠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구연흠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구연흠 전후면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국제모쁠 제2차조선대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이칭
이칭
창해(滄海), 창애(蒼崖), 강재후(江載厚)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3년(고종 20)
사망 연도
1937년
출생지
경기도 양주
관련 사건
3·1운동기념시위(1932)|6·10반세운동|8·29망국기념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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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국제모쁠 제2차조선대표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개설

경기도 양주 출신. 창해(滄海), 창애(蒼崖), 강재후(江載厚)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1년 대한제국 궁내부 시종원 우시어(右侍御), 내부(內部), 지방제도 조사원, 내부 주사를 지냈다. 이후 농업에 종사하다 1919년 가을 『만주일보』의 봉천(奉天) 지국장을 지냈다.

1922년에 무산자동맹회, 1923년에 신사상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4년 『동아일보』 지방부장을 지냈고, 1925년 『시대일보』 영업국장 및 논설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신문기자 단체인 무명회(無名會)에 가입하였다.

그 사이 화요회 그룹에 지지를 보내며 서울청년회계와 세력을 확대하는 경쟁에 참가해 2월에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화요회그룹과 연관이 있는 불꽃사(火花社)의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1925년 6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뒤 1926년 2월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 중앙검사위원이자 혁명자후원회(모쁠) 위원이 되었고, 3월에 당중앙위원회의 후보위원으로 뽑혔다.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는 언론기관과 사상단체 내에서 프랙션활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시대일보야체이카 책임자 겸 제2구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14일 화요회·무산자동맹회·조선노동당·북풍회가 참가한 ‘4단체 합동위원회’는 정우회(正友會)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구연흠도 이때 참가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피해 10월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7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모쁠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7년 5월 상해로 돌아왔는데, 때 마침 상해에서는 민족유일당 촉성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927년 6월 상해지역의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해 활동하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에 가입하는 한편, 1927년 9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장쑤성위원회 파난구(法南區) 한인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6월 대만 일본 등지의 참가자들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 결성에 참여해, 11월부터 총무부비서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를 해체한 뒤 결성한 사회주의자들만의 조직인 유호(留滬)한국독립운동자동맹에서 총무부장으로 활동했으며, 기관지 『앞으로』를 발행하는데 참여하였다.

이로써 상해지역에서의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기 위한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민족주의운동 세력과 사회주의운동 세력간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갔다. 1929년 11월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해 광주학생운동을 선전하고자 ‘상해 각 단체 연합회’를 12월에 결성하였다.

1930년 1월에는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의 이름으로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대중적 시위운동을 조직하였다. 1930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2년 상해에서 3·1운동 기념시위, 6·10만세운동 기념시위, 8·29망국 기념시위 등을 주도하였다. 1932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1935년 10월 출옥해 1937년 2월 2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감수, 창작과 비평사, 1996)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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