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하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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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사건
청산리 독립전쟁의 일부로서, 1920년 10월 25일 밤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고동하(古洞河) 계곡 일대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부대가 추격 중인 일본군 부대를 격퇴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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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청산리 독립전쟁의 일부로서, 1920년 10월 25일 밤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고동하(古洞河) 계곡 일대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부대가 추격 중인 일본군 부대를 격퇴한 전투.
내용

1920년 10월 18일부터 독립군 연합 부대는 추적하는 일본군 동(東)지대와 계속해서 산발적인 교전을 벌였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독립군의 전력을 보전하기 위해 수립한 피전책(避戰策)에 따라 일본군의 탄압 지역 밖에 있는 안도현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이동하였다. 25일 고동하 계곡 일대에서 홍범도 부대 300여 명 및 김좌진 부대 예하의 약 30여 명이 함께 숙영하고 있었다. 독립군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이날 밤 10시경 고동하 계곡에서 숙영 중인 독립군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일본군은 밤 12시경에 야음을 이용하여 독립군 야영지를 기습하였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 일부는 이미 이러한 야습에 대비하여 고동하 계곡 사방의 산정에 매복 중이었다. 때문에 일본 수색 부대의 공격을 조기에 감지하여 대응할 수 있었다. 독립군 부대는 전열을 수습한 뒤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방어가 유리한 인근 고지로 재집결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고동하 계곡의 일본군을 우회하여 역습하였다.

독립군이 인근의 고지에 올라가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攻守)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독립군은 피전책에 따라 이들을 버려둔 채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전투 직후 일본군 역시 홍범도 부대의 전력을 파악한 후, 전력 약세를 핑계로 26일 봉밀구(蜂密溝)로 퇴각하였다. 일본군은 고동하전투에서 독립군의 사상자가 약 30명이고, 소총 10정, 탄약 약 1만 발을 포획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참고문헌

『간도출병사(間島出兵史)』(조선군사령부, 1925)
『홍범도 장군: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반병률, 한울아카데미, 2014)
『항일무장독립전쟁의 군사사학적 연구-청산리전역을 중심으로』(조필군,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청산리 전역의 전개 배경과 독립군의 작전」(신효승,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6)
「청산리 전역시 일본군의 군사체계와 독립군의 대응」(신효승, 『학림』 37, 연세대 사학연구회, 2016)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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