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용석(金龍錫). 1927년경부터는 김호(金鎬)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강원도 양양군에서 태어나 1910년 가족을 따라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대랍자(大拉子) 부근으로 이주하였다.
화룡현 대랍자소학교와 용정(龍井)의 동흥중학(東興中學)에 다녔다. 재학 중 학생비밀조직에 참가하여 강연회 활동을 등을 벌였다. 졸업 후 대성촌(大成村)에서 교사생활을 하는 한편 반제동맹과 호제회(互濟會) 조직에 참여하였다.
1930년 5월 화룡현과 연길현 일대에서 있었던 반제반봉건운동에 참가하던 중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1년 초 화룡현 대랍자구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31년 5·1메이데이 기념투쟁, 추수투쟁(秋收鬪爭)에 참가하였다.
1932년 춘황투쟁(春荒鬪爭)에 참가한 뒤, 그해 말 어랑촌(漁浪村) 유격근거지로 이주하였다. 1933년 겨울 일제의 겨울철 토벌 때 화룡현위원회 서기 최상동(崔相東)과 유격대 중대장 김세(金世)가 사망하자, 3월에 중국공산당 화룡현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33년 11월 친일 주구 자치단체인 민생단(民生團)원 혐의를 받아 서기직을 박탈당한 이후에도, 화룡현에 있는 차창자(車廠子)에서 구국군을 획득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1934년 차창자 항일유격근거지 건립에 참여하였다.
1934년 10월 민생단원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11월에 열린 선판대회(宣判大會)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대중들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중국인 동료들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