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진탁(金振鐸)이다. 함경북도 무산군 출신으로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용정(龍井)의 사회주의 교육기관인 동양학원(東洋學院)에서 수학하였다.
서울청년회 계통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사회주의 학생단체인 건설자동맹(建設者同盟)에도 가입해 도서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7월 ‘동양학원 탄압사건’으로 간도총영사관 경찰에 검거된 적이 있었으며, 9월 국제공산청년데이 때 격문을 살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24년 10월 경성노동청년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 3월 재경조선해방운동자단체연합간친회에 조선노동청년회 대표, 4월 전조선노동대회 준비위원, 8월 경성기도청년연합회 발기준비회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하였다. 표면적인 활동의 이면에서 서울청년회 계통의 지하 전위단체인 고려공산청년동맹에 가담해 학생세포단체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서울청년회계 신파의 일원으로 조선공산당에 가담해 1927년 만주총국 동만구역국 제7야체이까에 배속되었다. 1928년 1월 동만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7월 ML그룹 조선공산당 동만도 선전부장 및 적색구원회(赤色救援會) 조직국장이 되었다.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31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늑막염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귀향 조치를 받았다.
그러나 서간도로 가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원산구세병원에서 그 해 5월 11일 사망하였다. 경찰이 그의 시체를 화장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150여 명의 대중들이 사체를 탈환해 원산 시내에서 행진하였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