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함경남도와 강원도, 서쪽은 황해, 남쪽은경기도, 북쪽은 평안남도와 접해 있다.
동단은 곡산군 백년산(百年山) 부근으로 동경 127°02′, 서단은 장연군 장산곶(長山串)으로 동경 123°38′, 남단은 옹진군 등산곶(登山串)으로 북위 37°40′, 북단은 곡산군 등가(登街)부근으로 북위 39°10′이다.
면적이 1만 6743.66㎢나 되어 전국토의 약 7분의 1에 해당한다. 인구는 1945년 현재 196만 1643명이며, 시부 인구(市部人口)는 황해도 인구의 3.2%를 차지한다. 인구 밀도는 117.2인/㎢이다.
낭림산맥(狼林山脈)·마식령산맥(馬息嶺山脈)·언진산맥(彦眞山脈) 등의 산맥과 대동강·예성강(禮成江)으로 둘러싸여 경기지방과 관서지방의 중간지대를 이루고 있어 남방 세력과 북방 세력의 오랜 각축장이 되어 왔다.
또한 자연 환경과 인문 환경에서도 점이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1개 시 17개 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청 소재지는 해주시이다.
이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해 곳곳에 석기시대의 유물이 남아 있다. 고인돌은 은율군 북부면 운산리를 비롯해 11개 군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탱석동(撐石洞)·지석동(支石洞)·괸돌마을·괸돌재·괸돌벌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또한 조개무덤은 장연군 몽금포와 황주군 황주읍 예동리에서 발견되며,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민무늬토기와 토제방차(土製紡車) 등이 출토되고 있다.
고조선은 건국 당시 평양에 도읍을 정했으나 후기에 들어 도내 구월산(九月山) 일대의 아사달(阿斯達)로 천도하였다. 이 때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고조선 문화의 중심지로서 아사달 사회를 건설하였다.
그 뒤 기원전 109년에 한나라 무제(武帝)가 침입해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했고, 얼마 뒤에는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해 황해도 대부분 지역을 관할하였다.
당시 대방군치(帶方郡治)는 오늘날 봉산군 문정면 토성리의 토성지(土城址)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곳을 중심으로 당시의 고분군과 유적이 많이 발견된다.
재령 평야(載寧平野) 주변에는 고당성(古唐城)·당성천(唐城川)·당탄(唐灘) 등의 지명이 남아 있으며, 재령강 연안의 상해(上海)는 당시 한인(漢人)들이 배를 타고 내왕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이 지역은 313년(미천왕 14)에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요서(遼西) 방면으로 몰아낸 뒤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들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남하 세력과 백제의 북상 세력이 이 지역에서 여러 번 충돌했으나, 고구려의 장수왕에 이르러 백제 세력을 물리치고 한강 이북 지방을 완전히 영유하게 되었다.
안악군에서는 제1호고분·제2호고분·제3호고분 등 고구려의 대표적인 고분들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벽화와 내부 구조가 정교하다.
그 뒤 신라의 세력이 강화되어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했고, 경덕왕 때에 자비령(慈悲嶺)을 중심으로 덕곡성(德谷城 : 곡산)·오곡성(五谷城 : 서흥)·휴암성(鵂巖城 : 봉산)·한성(漢城 : 재령)·장색성(獐塞城 : 수안)·지성(池城 : 해주) 등의 6성을 구축해 대륙에 대한 방어선을 견고히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9주제(州制)가 실시됨에 따라 경기 및충청북도 동북부 지방과 함께 한주(漢州)에 속하였다.
고려가 건국되고 개성에 도읍을 정함에 따라 이 도와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995년(성종 14)에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경기 지역과 함께 관내도(關內道)에 속하게 되었고, 해주(海州)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설치되었다.
1018년(현종 9)에 관내도를 양광도(楊廣道)·서해도(西海道)로 양분하면서 서해도로 되었고, 1069년(문종 23) 경기 지역을 확장할 때 양광도·교주도(交州道)·서해도의 일부를 경기에 포함시켰다.
1391년(공양왕 3)에 경기 지방을 양분하면서 이 지역은 경기우도(京畿右道)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 송나라와 일본과의 교역 왕래는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를 이용해 이루어졌으며, 사신들은 옹진반도에 상륙해 배천(白川)을 지나 개성에 들어왔다.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은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했으나, 그 뒤 8도제가 확정되면서 1395년(태조 4)에 풍천(豐川)과 해주의 이름을 따서 풍해도(豐海道)로 되었다. 1417년에 황주(黃州)와 해주의 이름을 따서 황해도로 개칭되고, 해주에 관찰사를 두어 2목 4도호부 7군 77현을 관할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 황연도(黃延道)로 바뀐 적도 있으나 곧 황해도로 환원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23부제가 도입됨에 따라 도의 동부는 개성부, 서부는 해주부, 황주지방의 일부는 평양부에 각각 속하였다. 1896년에는 23부제가 13도제로 개편되어 다시 황해도로 환원되고 23군을 관할하였다.
1914년에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시행되었는데, 강령(康翎)·토산(兎山)·장련(長連)·문화(文化)·풍천·배천 등의 6개 군이 옹진·신계·은율·신천·송화·연백 등에 각각 통합, 폐지되어 17개 군이 되었다. 1938년 해주시가 승격되어 해주군을 벽성군으로 개칭하였다. 광복 전 행정 체계는 1개 시 17개 군 11개 읍 199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형]
지질은 조선계(朝鮮系)에 속하는 수성암(水成岩)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해주에서 구월산에 이르는 지역은 화강암 분출대(花崗岩噴出帶)를 이룬다. 화강암은 연백과 평산에 이르는 멸악 산지와 수안 지방에도 일부 나타난다.
해주와 구월산을 잇는 동쪽과 연백 서북부, 금천·평산·수안 일부에서는 시생대의 회색 화강편마암이 발달해 있고, 재령강 양안과 예성강 중류 지방에는 상부 대동계(大同系) 지층이 분포하며, 예성강 서쪽 금천지방에는 평안계(平安系) 수성암이 나타난다.
신계·곡산 지방에는 제3기에 분출한 현무암(玄武岩)이 용암대지(熔岩臺地)를 이루며, 재령평야와 연백평야의 일부 지역과 소하천 연안에는 제4기 충적층이 분포한다. 또한 동서·남북 방향으로 발달된 여러 개의 구조선상에는 수많은 온천이 용출해 우리 나라 제일의 온천지대를 이룬다.
동서로 횡단하는 산맥으로는 요동 방향의 언진·멸악산맥과 중국 방향의 마식령산맥이 있다. 언진산맥은 낭림산맥 남단에서 분기되어 도의 동북부를 달리는 험준한 산맥으로, 하람산(霞嵐山, 1,486m)·서백년산(西百年山, 1,217m)·언진산(1,120m) 등 1,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가 연이어 솟아 있다.
또 멸악산맥은 동서로 관통하는 산맥으로, 멸악산(816m)·장수산(長壽山, 747m)·수양산(首陽山, 899m)·불타산(佛陀山, 608m) 등 800m 내외의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하천에 의해 산맥의 여러 곳이 끊어지고 낮은 안부(鞍部)가 발달해 교통상 큰 장애는 없다.
이러한 대산맥 사이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4개의 소산맥이 발달하였다. 구월산맥은 강령에서 미륵산(彌勒山)을 지나 구월산으로 서해안을 따라 이어지며, 자모산맥(慈母山脈)은 연안에서 운달산(雲達山, 600m)·차일봉(遮日峰)·고방산(高坊山)·자모산으로 이어진다.
육장현산맥(六將峴山脈)은 예성강 하구에서 차유령(車踰嶺)·육장현으로 이어지며, 마항산맥(馬項山脈)은 예성강과 임진강의 분수령을 형성한다. 이러한 산맥들의 형세에 따라 동북부와 서쪽이 높고 중앙 북부의 재령강 유역과 남서부가 낮은 지세를 나타낸다.
주요 하천으로 동부 지역을 흐르는 예성강은 대각산에서 발원해 지석천(支石川)·구룡천(九龍川)·누천 등의 지류를 합하고 남쪽으로 흘러 한강에 합류된다.
멸악산맥 남쪽 예성강 서쪽에 전개되는 연백평야는 호남평야·재령평야에 이어 우리 나라 제3의 평야로, 해안 부근에는 충적지가 넓게 발달되었으나 주변 지역은 다소 기복이 있는 파랑상의 구릉지이다.
재령강은 지남산에서 발원해 은파천(銀波川)·서흥강(瑞興江) 등의 지류를 합치고 북쪽으로 심한 곡류를 형성하면서 대동강으로 유입된다. 하천의 길이는 129㎞에 지나지 않으나 그 유역에는 재령평야가 발달하였다.
재령강 양안에는 낮은 평지가 잘 발달해 재령나무리벌·신천어루리벌과 같은 평야를 이루는데, 그 곳은 쌀 생산지로 유명하다.
이 밖에도 평안남도와 경계를 이루는 남강(南江), 장연의 남대천(南大川), 해주 서쪽의 취야천(翠野川) 등이 있다. 해안선은 1,618㎞에 달하는데, 장산곶 북쪽은 출입이 단조로운 데 반해 옹진반도를 비롯한 남쪽은 매우 복잡하다.
해상에는 초도(椒島)·기린도(麒麟島) 등 130여 개의 섬들이 분포하고, 조차는 7m 내외로 간석지가 크게 발달해 간척 사업이 활발하다.
[기후]
대체적으로 냉대하계고온기후(冷帶夏季高溫氣候)에 속하며 멸악산맥 북쪽의 북부 서안형, 멸악산맥 남쪽의 중부 서안형, 동북부 산악지대의 북부 내륙형 등으로 세분된다.
1월평균기온은 -5∼-8℃로 경기 지방보다 2∼4℃가 낮고 관서 지방보다 2∼4℃가 높으나, 같은 위도상의 동해안 지방에 비하면 3∼4℃ 내외가 낮다. 최저 기온은 곡산에서 기록된 -33℃였다. 7월평균기온은 24∼25℃ 내외로 우리 나라의 다른 지방과 큰 차이가 없으며, 기온의 연교차는 경기지방보다 훨씬 크다.
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크다. 동북부의 산악지대는 1,200㎜, 멸악산맥 이남 지방은 1,000㎜ 내외를 보이나, 멸악산맥 이북의 서북부 지방은 700∼800㎜로 우리 나라 최과우 지역 중 하나이다.
강우 분포는 계절풍이 부는 여름철에 60% 이상 집중적으로 내려 하계다우형이다. 증발량은 1,300㎜ 내외에 달하고, 쾌청 일수 110일, 일조 시수 60∼62%를 나타내어 우리 나라에서 최다조 지역(最多照地域)을 이룬다.
대개 첫서리는 10월 10일, 마지막 서리는 이듬해 4월 10일경으로 무상 기일이 180일 정도이다. 해안 지방에는 안개 현상이 심한데, 특히 장산곶 부근이 심하다. 이와 같이 멸악산맥을 경계로 기후의 차이가 심해 식생 및 농업에 영향을 미친다.
멸악산맥은 감나무·동백나무 등 난대 식물의 북한계를 이루며, 벼에 있어서도 중생종과 조생종의 경계가 된다. 또한 한때는 육지면(陸地綿)의 북한계선을 이루었다.
[인구]
최초로 인구 조사가 시행된 1925년의 인구는 약 146만 명으로 전국 총인구의 7.6%를 차지하였다. 인구는 계속 증가해 1930년 152만 명, 1935년 167만 명, 1940년 181만 명, 1944년 202만 명으로 전국 총인구의 8.0%에 이르렀다.
인구 증가율에서 보면 1925∼1930년에는 4.2%로서 전국 평균의 7.9%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1930∼1935년에는 9.9%, 1935∼1940년에는 8.3%, 1940∼1944년에는 11.2%로 전국 수준을 능가하였다.
초기에는 예성강 유역의 혹심한 한발과 도민의 만주 유출 등으로 인구 증가가 소폭에 그쳤으나, 1930년대 이후에는 농업 개발 및 광공업 발달로 고무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서울·평양 등 대도시의 소개 인구(疎開人口)를 수용해 증가폭이 커졌다.
한편 인구 밀도는 1925년의 77인/㎢에서 1944년의 120인/㎢로 증가했는데, 경지 면적에 대한 인구 밀도는 약 370인/㎢으로 전국 수준에 못 미치며, 특히 연백평야·재령평야의 여러 지역에서는 이보다 훨씬 낮다. 산업별 인구 구조는 농수산업이 전체의 약 70%, 광공업이 10%, 3차 산업이 20%로 되어 있다.
[취락]
서울과 평양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경의선이 생산지대를 우회해 통과하며, 광공업의 발달이 미약하고 광범위한 농업지대를 이루어 도시의 발달이 미약하다. 도시로는 해주시가 있으며, 겸이포읍과 사리원읍 등은 규모가 크다.
해주는 오랫동안 도의 행정·문화 중심지로 발전해 왔으며, 근년에는 시멘트·화약·금속·기계류 등 중화학공업이 발달해 공업적 기능을 갖추었다. 겸이포는 부근의 풍부한 철광석과 편리한 수운을 배경으로 일찍이 제철소가 건설되어 공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사리원은 경의선과 황해선의 분기점을 이루어 교통 중심지와 농산물 집산지로 성장하였다. 이 밖에 배천·연백·장연·은율·신천·안악·재령·황주·흑교·남천·신막 등은 일정한 간격으로 입지한 인구 2만 명 내외의 농업 중심지 기능을 갖춘 지방 소도시이다.
취락은 동부 산간지대에 있는 남정·홀동 등의 금광 취락, 백년·기주 등의 중석광 취락, 재령강 유역에 위치한 하성·은율·재령·금산포 등의 철광산 취락, 봉산의 탄광 취락 등 광산 취락이 많으며, 연안·마산·송화·삼천·달천·신천·안악·배천·평산 등의 온천 취락과 몽금포·구미포 등의 보양 취락도 있다.
예로부터 하천과 연해를 통한 무역으로 상업이 이뤄졌으며, 연철(鉛鐵)·면화·미곡의 생산과 더불어 어업 및 제염업에도 힘써 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도내에는 재령평야·연백평야를 비롯해 크고 작은 평지가 곳곳에 잘 발달해 농업이 주를 이루었다.
[농업]
평야가 많아 경지율이 약 34%로 전국에서 제일 높으며, 특히 연백·신천·재령·안악 등의 평야 지방은 경지율이 50∼60%에 이른다.
경지 면적은 약 60만 ㏊로 전국의 약 14%를 차지하며, 농가 1호당 경지 면적도 2.4㏊에 달해 전국에서 1위였다. 이 중에서 논은 약 17만 ㏊, 밭은 40만 ㏊로 밭이 논보다 훨씬 많다.
연간 쌀 생산량은 약 250만 섬에 달하며 재령 평야·연백 평야가 주산지이다. 연백미·재령미는 품질이 우수해 예로부터 왕실의 공어미(貢御米)로 쓰여 왔고, 특히 재령미는 북률무사미(北栗無砂米)로 유명하였다.
재령평야는 원래 갈밭으로 덮인 저습지였으나 1920년대에 재령강의 곡류(曲流)를 바로잡고 배수와 관개 시설에 힘써 옥답으로 바꾼 것이다. 재령강 상류의 안녕저수지(安寧貯水池)와 서흥강 상류의 재신저수지는 관개용 대저수지이다.
연백평야는 해안 지방을 제외하면 낮고 평평하지 않다. 그래서 종래에는 밭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나, 멸악산 남쪽 산록에 연해저수지·황해저수지를 구축하고 해안에 대규모 제방을 쌓아 간척 사업을 벌여 논의 면적이 크게 증가하였다.
주요 전작물은 조·기장·수수·콩·팥·밀 등이다. 밀은 식부 면적 14만 ㏊에서 약 100만 섬이 생산되고, 조는 18만 ㏊에서 140만 섬이 산출된다.
이 지역에서는 강우량이 적고 증발량과 일조 시수가 많으며 때때로 불어오는 높새바람 등 기상 조건이 나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진압(鎭壓)이라는 건조 농법이 성행하였다.
2모작이 불가능한 기후 때문에 토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3종류의 작물을 2년에 3번 번갈아 수확하는 2년 3작 농법이 채용되고 있으며, 혼작·간작 등의 경종법(耕種法)도 전역에 보편화되었다.
특용 작물로는 면화·대마·인삼·담배 등이 많이 재배된다. 풍토가 면화 재배에 적합해 평안남도와 더불어 재래면의 2대 산지였는데, 1940년대에 들어와 완전히 육지면으로 바뀌었다. 특히 일제의 적극적인 면화 증산 계획에 따라 면화 재배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광복 전에는 재배 면적 4만 ㏊에서 2만1000톤을 생산해 전라남도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 이 밖에도 대마와 담배는 동북부에서 재배되며, 인삼은 금천·서흥 지방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과일로는 사과·배·복숭아·밤 등이 많이 재배된다. 황주 지방은 일조량이 많고 구릉지는 배수가 양호해 사과 재배에 알맞다. 황주 사과는 국내는 물론 만주·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재배 지역이 황주를 중심으로 하여 봉산·평산·은율·송화 등지로 확산되었다.
이 지역의 사과 품종은 홍옥·국광이 대종을 이루며, 연간 생산량은 3만 7500톤에 달해 전국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 밖에도 해주 지방의 배·복숭아, 수안 지방의 밤 등이 특기할 만하다.
동북부 산간 지방은 양잠업이 성하여 가내 공업으로 이루어지는 명주의 소산지이다. 축산업도 활발하며 북부 산간 지역은 소 사육지로 유명해 광복 전에는 연간 약 20만 마리를 일본 등지로 수출하였다.
양돈은 전라남도·평안북도에 이어 3위, 양계는 평안북도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1935년부터 시작한 면양 사육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수산업]
서쪽과 남쪽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1,600여㎞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연해의 수심이 얕고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므로 양식과 어업에 알맞다. 대표적인 수산물 어종은 조기로서, 연평도 근해는 우리 나라 최대의 조기 어장이다.
성어기에는 전국에서 수천 척의 어선들이 운집해 파시(波市)를 이루며 대부분이 경인 지방으로 공급되는데, 연간 어획량은 7,000여 톤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이 밖에도 새우·갈치·민어·해삼 등이 많이 잡히고, 용호도(龍湖島)를 중심으로 한 옹진반도 연안에서는 김 양식이 성하다. 또한 연안 지방에서는 간척에 의한 대규모의 염전이 조성되어 있다.
[광업]
지하 자원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419개의 각종 광구(鑛口)가 있다. 주요 광물은 금·은·동·철·납·아연·중석·중정석·흑연·형석·고령토·석회석 등이다.
금은 수안군의 홀동광산, 중석은 곡산의 백년·기주 광산, 철광은 재령평야 주변의 하성·은율·재령·송림·금산포 철산에서 많이 산출된다. 이 밖에도 서흥의 석회석, 장산곶의 규사 등이 있으며, 백년광산은 강원도의 상동광산과 더불어 세계적인 중석 광산이다.
[공업]
공업은 해주시·겸이포읍·사리원읍 등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해주에는 시멘트·화약·제련·제강·각종 기계 기기 등의 중화학공업과 고무·제지·식품 등의 경공업이 함께 발달하였다.
겸이포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제철소가 건설되어 제강·코크스·벤젠·암모니아·황산·내화 벽돌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사리원에는 부근의 풍부한 농산물을 원료로 제분·제사·방직·양조·농기계 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이 밖에도 마동의 시멘트공업, 신막의 기계공업, 수안·홀동·백년 광산의 제련업 등이 있다. 전통적인 공산품으로는 해주의 박석과 먹, 수안의 한지·명주, 평산의 옹기·돗자리, 서흥의 유기·명주, 봉산의 백도자기 등이 유명하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해 서울에서 서북쪽의 대륙 방면으로 나가는 요충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찍부터 교통상으로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이후 개성·연안·배천·송화(松禾)에 이르는 산예도(狻猊道), 강음(江陰)·평산·서흥·곡산에 이르는 금교도(金郊道), 봉산·황주·평안도로 이어지는 절령도(岊嶺道) 등의 세 가지 역로(驛路)가 있었다.
서울∼의주간을 잇는 의주가도(義州街道)는 금천·평산·서흥·봉산·황주를 지나고, 개성에서 배천·연안·해주·장연·풍천에 이르는 도로는 예로부터 중요한 육상 교통로였으며, 봉수망(烽燧網)도 대략 이 도로와 병행하여 설치되었다.
철도는 1905년에 개통된 경의선의 경의가도와 병행하여 부설됨에 따라 신막·사리원 등의 신흥 교통 취락이 형성되었다. 그 뒤 부설된 사리원∼장연간의 사장선(沙長線), 사리원∼해주간의 사해선(沙海線), 토성∼해주간의 토해선(土海線), 해주∼옹진간의 해옹선(海甕線, 일명 黃海線) 등은 산업지대를 관통하고 있다.
예성강·재령강의 수운 교통은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쇠퇴했으나 그 이전에는 물자 수송에 지대한 구실을 하였다. 예성강 연안의 하항(河港)은 벽란도·조포·한포 등이며, 재령강 연안의 하항은 상해포·해창·신환포 등이다.
특히 재령강은 재령평야의 풍부한 농산물과 철광석 수송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해상 교통은 고려시대에 중국·일본 등지와 연락하는 수단으로 많이 이용되었으며 근대적인 개항장은 해주뿐이다. 이 밖에도 겸이포·나진포·구미포 등의 양항이 있다.
1895년 현대식 학교 설립에 관한 규칙에 의거, <소학교령 小學校令>이 제정된 이후 해주·사리원·황주·연안·서흥 등지에 5개의 공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사립학교도 재령에 명신학교(明新學校), 안악에 봉삼학교(奉三學校)·안신학교(安新學校)·양산학교(楊山學校), 해주에 의창학교(懿昌學校)·해동학교(海東學校)·의정여학교(懿貞女學校)·정내학교(正內學校) 등이 부설되었는데 이것이 도내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는 도시나 농촌을 막론하고 학당·사숙(私塾)·강습소 등을 세워 애국과 국권 회복 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찍이 1906년에는 해서 지방(海西地方) 선각자들의 주도 아래 서북학회(西北學會)가 조직되었고, 사립학교도 287개교에 달하였다.
광복 직전 도내에는 초등학교 418개교(간이 학교 148개교 포함), 남자 중학교 4개교, 고등 여학교 6개교, 실업 학교 17개교 등이 있었다.
동북부의 신계·곡산·수안 등지는 예로부터 산중 3읍이라 하여 산악이 웅장하고 기암 괴석이 즐비하다. 또한 신천·안악·은율에 걸쳐 있는 구월산은 금강산·지리산·묘향산과 더불어 우리 나라 4대 명산으로 꼽힌다. 구월산은 웅장하지는 않으나 정상에서의 조망이 일품이며, 우리 나라 31본산의 하나인 패엽사(貝葉寺)와 구월산성이 있다.
재령의 장수산은 12계곡과 묘음사(妙音寺) 일대의 경치가 아름다워 황해금강(黃海金剛)으로 불리며, 서흥 숭덕산(崇德山)의 귀진사(歸眞寺) 일대는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어진다. 해주에는 부용당(芙蓉堂)·석빙고(石氷庫)·범자탑(梵字塔)·해운정(海雲亭) 등의 유서 깊은 문화재가 많다.
또한 연안의 남대지(南大池)·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평산의 태백산성(太白山城)·구봉서원(九峰書院), 장연의 조개무덤, 안악의 고구려고분, 몽금포·구미포의 명사십리(明沙十里), 봉산의 당토성(唐土城)·휴류성(鵂鶹城), 정방산(正方山)의 성불사(成佛寺)·정방산성(正方山城), 자비령의 절령관문(岊嶺關門), 곡산의 고달사(高達寺) 등도 유명하다.
도내에서 지정된 고적은 대방태수장무이묘(帶方太守張撫夷墓)를 비롯한 4점, 보물은 심원사보광전(心源寺普光殿)을 비롯한 9점, 천연기념물은 해주 학도래지를 비롯한 5개소 등이다. 이 밖에도 민속 예술로서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 등이 전하며, 대표적인 민요는 <몽금포타령>·<금산포도라지타령>등이다.
광복 후 행정 체계는 사리원읍이 시, 겸이포읍이 송림시로 승격되어 3시 17군이었으나, 1950년 6·25 이후 휴전선에 의해 장단(長湍)·개풍(開豐) 등이 편입되었다. 1954년 행정구역 개편시 황해남·북도로 분리되었다.
황해남도에는 광복 당시의 해주시·벽성군·장연군·송화군·은율군·안악군·신천군·재령군·옹진군 등이 포함되고, 황해북도에는 사리원시·송림시·황주군·봉산군·서흥군·수안군·곡산군>·신계군·평산군·금천군 등이 속하였다.
휴전 후 북한 지역으로 된 개풍·장단 지역은 장풍군(長豐郡)이 되었다가 뒤에 개성직할시로 승격되고 연백군은 폐지되었다. 이 밖에도 지명의 변천이 많았는데, 장연군의 태자리(太子里)는 샘물리로, 재령군 대흥리는 김제원리(金濟院里)로, 신천군 온천리는 장재리(長財里)로, 서흥군 당현리(唐峴里)는 온정리로 개칭되었다. 또한 수안군 대오면의 조양리, 서흥군 신막읍의 천곡리, 봉산군 동선면 도림리와 구연면 구산리 등은 폐지되었다.
1954년에는 종래의 이(里)를 2∼3개씩 합해 광역의 이를 신설하고, 면을 폐지해 군이 직접 이를 관할하게 하였다. 이러한 10여 차례에 걸쳐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면적 1만 6,447㎢에 인구 350만 명(1988년 현재)을 가진 2도·3시·33군·33읍·15노동자구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강령·태탄(苔灘)·용연(龍淵)·삼천(三泉)·과일·은천(銀泉)>·연안(延安)·배천·신원(新院)·평천(平川)·청단(淸丹)·은파(銀波))·연산(延山)·신평(新坪)·인산(麟山)·토산·연탄(燕灘) 등의 군 지명이 생겨났다.
산업면에서는 재령·안악·연안·황주·봉산·신계·평산의 평야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고, 해주·배천·신천에는 채소 농장이 생겨났다.
이른바 과일군이라 불리는 송화군 일부 지역에서는 6·25 이후 과수원을 조성해 과수 농장으로 유명하며,용연 지방에는 국영축산농장, 평천·강령·청단 지방에는 양봉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지방의 특산물로는 벽성·옹진의 곶감, 봉산의 대추, 사리원의 포도 등이 유명하다. 공업 시설로는 송림의 황해제철소와 해주시의 제지·농기계·편직·구두 등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으며, 사리원에는 1986년 이후 대단위 비료 공장이 건설되고 있다.
철도는 광복 후 청년이천선(평산∼세포간)과 은율선(은파∼철광간)이 새로 부설되었고, 도로는 평양∼개성간 고속도로가 통과한다. 교육기관은 해주·사리원·송림 등지에 농업·의학·사범대학과 각종 전문대학이 많이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