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

만주 한묘 출토 전계문전 탁본(탑본)
만주 한묘 출토 전계문전 탁본(탑본)
근대사
지명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요령성 · 길림성 · 흑룡강성 및 내몽고 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한 지역.
지명/고지명
지역
중국의 동북지방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만주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요령성 · 길림성 · 흑룡강성 및 내몽고 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한 지역이다. 고대부터 여러 종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변경지역이었다. 1870년대~1900년대까지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이루며 항일민족운동을 벌인 곳이다. 농민으로 구성된 한인사회는 민족운동의 기반이었다. 20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1932년 만주국을 건국하였고 일제는 전쟁과 개발에 동원하기 위하여 조선인에 대한 정책이민을 추진하였다. 조선인은 '불령선인'에서 '개척자'로 불렸다.

정의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요령성 · 길림성 · 흑룡강성 및 내몽고 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한 지역.
명칭의 유래와 변천

만주의 어원은 여러 가지이다. 범어(梵語)인 ‘만주사리(曼珠師利, Man-chu-shih-li)’, 숙신(肅愼, Shu-chen)의 전음(轉音)인 주신(珠申, Chu-shen), 만절(滿節)에서 전화되었다는 등의 설이 있다. 또 누르하치가 건주여진(建州女眞)의 가장 존귀한 칭호였던 ‘만주(滿住)’를 사용하였고, 청나라 태종이 이를 ‘만주(滿洲)’로 바꾸어서 부족 이름으로 사용하였다는 설도 있다. 마지막으로 ‘건주(建州)’와 같은 소리였으나 분화되었다는 설이 있다.

청나라 초에는 자기 종족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지역명으로 바뀌어 사용하였다. 또 초기에는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지방을 칭하였지만, 만주 전역을 가리키는 용어로 확대되었다. 중화민국 시기에는 만주보다 ‘동삼성(東三省)’이라 불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만주라는 용어 자체가 식민지의 유산이라는 인식 때문에 사용을 꺼렸으며 대신 ‘동북지구(東北地區)’로 불렀다. 일제가 만주를 중국 본토와 역사적 · 지리적으로 별개의 지역으로 분리하였고,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한국가 일본에서는 '만주'와 '중국의 동북지구'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만추리아(Manchuria)’라는 용어로 정착되어 있다.

만주 지역의 역사적 변화

만주 지역에는 고조선, 고구려, 말갈, 선비, 발해, 거란(契丹), 여진(女眞), 몽고(蒙古), 만주족(滿洲族) 등 여러 종족이 살았으며 이들은 다양한 사회와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면서 존속하였다.

1625년에 청나라의 태조가 랴오양[遼陽]에서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겼고, 1644년에 베이징[北京]을 수도로 정한 뒤에 선양을 배도(陪都)로 정하였으며, 1657년에는 만주지역에 봉천부(奉天府)를 두었다. 만주족의 많은 사람이 관내(關內)로 이주하였고, 1677년에는 청나라가 그들의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연안과 두만강 북쪽에 걸친 1,000여 리 되는 지역에 봉금령(封禁令)을 선포하였다. 봉금정책을 실시하면서 이주가 금지되었고, 이곳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으로 변하였다.

조선 왕조도 병자호란 이후 국경을 넘어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1710년에 백두산정계비 설치로 양국의 국경이 확정된 후 국경을 넘는 일을 더욱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변경에서 분쟁지로

18세기에 이르러 북만주의 변경 지역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산둥 지역의 가난한 중국인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 왔고 19세기에는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서 정착하였다. 조선인들의 이주는 187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서 국경을 넘었는데, 대체로 함경북도평안북도의 사람들로 변경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변경 지역은 지형과 기후가 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함경도는 지형적으로 산악이 분포되어 있었고 기후가 한랭하여 일부 해안 지역과 하천 정도를 제외하고는 논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강 건너 만주 지역의 넓고 비옥한 토지는 변경 지역의 사람들에게 충분한 유인 요인이 되었다.

또 1860년대에 변경 지역에 닥친 전염병자연재해는 사람들에게 월경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1860년에 대수해, 1869년에 '기사년 재해', 1870년에 '경오년 재해' 등 대흉년이 이어지면서 많은 사람이 유리걸식하였고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왕조의 봉건적 부세 수취와 도를 넘은 수탈이 자행되자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국경을 넘을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전반까지는 땔감이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국경을 넘어갔으나 19세기 중반부터는 집단으로 건너가 마을을 형성하여 장기간 거주하는 형태로 변하였다. 이 지역은 무엇보다 장기간의 봉금령으로 땅이 비옥하였고 이동하기도 쉬웠다. 겨울에 두만강이 얼어붙으면 걸어서도 갈 수 있었고 나룻배 정도로도 가뿐하게 건너갈 수 있었다.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은 원하던 수전농법으로 경작하면서 꽤 괜찮은 수확을 올렸다. 당시 만주에서는 대두, 고량, 수수, 옥수수, 밀, 보리, 조 등 밭작물을 주로 생산하였는데, 조선인들은 습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만주에서 수전농법은 월경한 조선인에 의하여 보급되고 발전하였다. 1860년대부터 청나라의 봉금령이 완화되었으며 이주민의 입주와 개간을 허용하는 정책이 추진되었고, 1880년에 이르러 결국 봉금령은 해지되었다.

19세기 후반까지도 중국의 변경으로 그다지 관심이 없던 지역이었으나 가난한 농민들이 이주하고 국제 정세가 변화하면서 만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러시아가 동북아시아로 진출하면서 국경 문제를 겪은 청나라는 이민을 통하여 변경을 개척하고 지역을 통제하는 이민실변정책(移民實邊政策)을 시도하였다.

청나라는 북만주를 개간하기 위해서 남강, 훈춘[琿春] 등 여러 지역에 월간국(越墾局)을 설치하고 중국인들을 변경으로 이주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개척에 필요한 사람들을 모집하고 이동시키고 정착시키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대량 이민을 실행할 정도의 교통수단이 부족하였고, 적당한 이주자를 모집하는 일도 어려웠는데, 독신의 유랑민이 많아서 영구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으기가 힘들었다.

봉금정책이 느슨해지고 폐지되는 동안 조선인 이주민이 늘어나 광활한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이 수천 명이 되었다. 이와 함께 국제 정세의 변화가 만주 지역을 분쟁지로 만들었다. 1882년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해졌고, 러시아와 조선 간의 관계가 긴밀해짐에 따라 변경의 개척지는 분쟁지로 변하였다.

러시아 · 일본 · 중국의 세력 교착과 항일민족운동

19세기까지 중국의 변방이었던 만주였지만 20세기 들어서 만주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집중되었다. 서구 열강의 계속되는 침략과 내분으로 청나라가 약화되자 만주는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확장을 위한 각축장이 되었다. 1905년에 러일전쟁 결과 만주의 남부는 일본의 주도 아래, 북부는 러시아의 주도 아래 놓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필두로 한 북양군벌이 성장하였고, 만주에서는 장쭤린[張作霖]이 주도권을 잡았다. 만주는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張學良]의 군벌정권과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교착상태를 이루게 되었고, 이 틈새 속에서 조선인들은 일상을 살아가거나 격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에서 벌어진 항일민족운동은 조선인사회를 기반으로 하였다. 조선한인사회는 생계를 위하여 국경을 넘은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생활의 안정은 상당히 중요하였다. 또 반일 정서와 반봉건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한편 만주는 변경일 뿐만 아니라 교착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만주의 조선인민족운동은 민족주의운동 계열과 사회주의운동 계열로 나뉘었다. 민족운동가들은 농민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조선인사회의 생활 안정과 항일투쟁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방안을 모색하였다. 민족주의운동 계열 인사들은 독립전쟁론을, 사회주의운동 계열 인사들은 조선혁명론을 주장하였다.

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사상은 대략 3 · 1운동 직후인 1920년대에 전파되었고 이 지역의 민중 지향적인 민족운동과 결합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만주지역의 조선인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세력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독립 이후에 비자본주의적 민족국가를 세우려고 하였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도 시기별 증감은 있었지만, 조선인들은 꾸준히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 만주에 정착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재만 조선인(在滿朝鮮人)’에 대하여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만주 소재 일본총영사관, 조선인민회와 같은 자치단체, 민영회사인 동아권업주식회사 등을 통해서 만주에 있는 조선인 문제에 간섭하였다.

만주국의 수립과 조선인 정책이민

1931년 9월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일본 관동군은 1932년 3월에 만주 일대에 인공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만주국은 법적으로 독립된 국가의 형식을 취하였고 공식 식민지가 아니었지만 일본제국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만주가 일본제국의 세력권이 되자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하는 데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만주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대량으로 이주시키고자 하였다. 이주한 일본인이 만주의 국방과 개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일본인의 이민은 예상 외로 저조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의 이민은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의지로 추진되었다.

조선인의 이민은 일본인과 같이 만주국의 농촌개발과 ‘협화’라는 건국 이념을 실현하는 데 중요하였다. 조선총독부에게 조선인을 만주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이민’은 일종의 사회정책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농촌 인구의 과잉 현상과 계속되는 경제불황으로 인한 실업 발생 등 사회의 불안을 해소하여야 했고, 만주를 그 탈출구로 삼았다. 또 ‘불령선인’의 온상인 재만 조선인사회를 포섭하고 항일세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이민이 필요하였다.

한편 조선인의 만주이민은 일본의 사회문제 해결과 연결되었다. 주로 남부 지역의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자리를 구하였는데, 조선인들은 가난한 빈민으로 집단 거주지를 이루면서 살았으므로 일본의 도시문제로 비화되었다. 조선의 사회문제가 일본으로 건너간 형국이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과 일본 본토의 사회문제를 해결한다는 입장에서 정책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만주 관동군은 중일전쟁으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찬성하였다. 만주는 인구 밀도가 낮고 노동력의 수준도 떨어져서 전시에 동원할 인구가 부족하였다. 이처럼 조선인 이민은 제국의 이익과 국방이라는 목적 속에서 이루어졌다. 만주에서 조선인 자작농창정(自作農創定) 사업을 실시하고, 안전 농촌과 집단 부락을 건설하는 동시에, 북변진흥계획(北邊振興計劃) 등의 일환으로 수전(水田)을 개발하였다. 그간 ‘불령선인’의 온상이었던 조선인의 만주 이민은 ‘개척’으로 선전되었다.

조선과 만주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권으로 포괄되면서 이들 양 지역 간의 관계는 긴밀해졌다. 만주국과 조선 사이에는 상당한 양의 물자와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만주국은 조선의 중요한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특히 일제의 미곡 반출에 따른 조선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만주산 농산물이 수입되었으며, 조선에서 부족한 전시물자의 상당량이 만주에서 유입되었다. 반대로 만주국에서는 쌀 · 생선류 · 인조견직물 · 시멘트 · 목재 등을 가져갔다.

해방 이후의 관계

1945년 해방까지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200만 명 정도에 달하였다. 중국인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해방 이후 이들 중 일부는 귀환하였으나 대부분은 만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중국은 이들을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한중수교 이후 한국인의 중국 진출에 적극적인 가교역할을 하였고, 현재 한국에 건너와 상당한 규모를 이루며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만주국의 경험이 전후 일본의 부흥과 개발에 영향을 미친 것과 같이 현대 한국사회에도 이어졌던 것이다.

만주국은 내전과 분단을 겪으며 건설되었고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간 만주국에 대한 관심이 적을 수 밖에 없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한중(韓中) 간의 경제적 · 정치적 · 문화적 교류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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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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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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