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면(金圭冕)은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백추(白秋)이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서울 한성사범학교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원산으로 이주했을 때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907년 만주의 훈춘〔琿春〕으로 가서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국내와 연결하여 신민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에 종교를 규율하는 「포교규칙」이 공포되자 ‘대한성리교회’를 만들어 복음서를 판매하면서 독립자금을 마련하였다.
1918년 일본이 시베리아에 파병하자 대한신민단을 창설하였고,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을 의해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으로 건너가 이동휘(李東輝) · 박진순(朴鎭淳) · 김립(金立) 등 30여 명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다. 또 이동휘계의 군사 지도자 이용(李鏞)과 손을 잡고 시베리아의 한인 군사 조직을 상하이 임시정부 산하에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21년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발생하기 직전인 5월 18일 오하묵(吳夏默)의 특무대에 한운룡(韓雲龍) · 박원섭(朴元燮) · 우시욱(禹時旭) · 주영섭(朱英涉) · 안태국(安泰國) · 임상춘(林常春) 등과 함께 검거되었으나, 풀려나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의 위원장이 되었다. 1922년에는 중국 관내로 들어가 활동하면서 ‘상하이청년동맹’을 조직하였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로 활동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교통총장으로 내정되었다. 1925년 ‘ 사회주의자동맹’을 조직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립된 민족운동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쿠데타 이후 연해주로 돌아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서점에서 동양 서적 판매원으로 일하였다. 1934년 이후 모스크바에서 연금 생활을 하였다. 이때 이동휘 등 함께 활동한 사람들과 자신의 활동기를 적은 글을 썼다. 1969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규면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