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참변 이전 북간도전역에 걸쳐 정비된 조직체를 가지고 있던 국민회가 일제의 간도지역 초토계획에 의하여 일시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곧 재기하여 군사부를 설치하고 서간도군비단(西間島軍備團)과 통합하여 1921년 10월 연해주 이만시에서 조직한 단체로 그 기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집행위원은 김찬(金燦)·김덕은(金德殷)·임표(林彪)·이용(李鏞)·마용하(馬龍河)·주학섭(朱學燮)·강재관(姜載官)·박춘근(朴春根)·최기학(崔基學) 등이었고, 사령부는 사령관에 이용, 참모장에 임표, 참모관에 한운용(韓雲用)·김홍일(金弘一), 재무부장에 김덕은, 문화부장에 주학섭, 서무부장에 김찬, 외교부장에 강재관이었다.
이러한 집행위원회와 사령부의 조직을 구성하여 항일독립전선에 뛰어들었다. 특히 조직의 측면에서 이전에 활동한 독립군 단체들 보다 짜임새 있었다. 사령관 이용을 중심으로 한 대한의용군사회는 이만전투 이후 적군(赤軍)의 특별보병대대로 개편되었으며, 적군사령부 방침에 의해 니콜라예프카로부터 인스크 사이의 500리에 달하는 광역의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등 활약하였다. 뒤에 신민부(新民府) 등의 강력한 독립군단체들에게 압도되어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