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사회당 ()

정치
단체
1918년에 이동휘(李東輝)가 중심이 돼 조직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정의
1918년에 이동휘(李東輝)가 중심이 돼 조직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개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에 고무된 이동휘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조선독립 달성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사회주의 정당을 1918년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창설했다.

설립목적

1918년 모스크바에 있는 제3국제공산당(제3 인터내셔널)에서는 극동 방면의 공산주의 선전위원으로 그레고리노프를 파견, 하바로프스크를 활동 근거지로 하여 공산주의 선전을 펴게 하였다. 이 무렵 독립운동에 전념해 온 이동휘는 항일독립운동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소련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레고리노프의 원조 아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연해주와 흑룡강 지방에 8개의 지부를 설치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민족주의를 배격했던 소련초기의 볼셰비키정권이 한인사회당을 원조했던 배경에는 눈앞에 닥칠 일본군의 출병을 한인들의 항일민족운동을 이용하여 막겠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다.

연원 및 변천

러시아 국적자인 한인들로 구성된 고려족중앙총회에 비하여 열세에 놓여 있던 한족중앙총회는 여호인 민족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친볼쉐비키적인 혁명적 전위조직의 건설에 나섰다. 이들은 하바로브스크에 거점을 둔 볼쉐비키 지도자인 크라스노췌코프(A.M. Krasnoshchekov)와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 페트로브나 등의 지도와 후원을 바탕으로 이동휘와 김립 등을 주축으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한인사회의 친볼쉐비키화에 주력하였다.

한족중앙총회세력을 중심으로 1918년 3월 하바로프스크에서 일본군의 시베리아출병에 대한 조직적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가 개최되었다. 대회는 1918년 1월 18일 러시아 원동지역연해주·흑룡주·사할린주·하얼빈의 10월혁명 지지파들이 원동러시아의 정권기관으로서 조직한 원동인민위원회의 의장 크라스노쉐코프와 하바로브스크시 소비에트 외무위원장이며 하바로브스크시 볼쉐비키당 책임비서인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의 후원과 지도하에 추진되었다.

한인2세 볼쉐비키인 김 알렉산드라는 남편인 오 바실리를 통하여 러시아임시정부가 일본정부의 요구에 따라 이동휘를 동경으로 호송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동휘의 석방운동을 적극 지원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우랄지역으로부터 연해주로 온 이후 많은 한인혁명가들을 만났고, 한인공산주의단체의 조직을 위한 회합의 개최를 구상하는 등 망명한인혁명가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큰 이동휘의 석방을 기다렸고, 노·중령의 한인민족운동세력간에 광범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이동휘의 석방으로 ‘조선인정치망명자회의’가 개최될 수 있었다. 이동휘는 대회준비위원장으로 서기 김립과 함께 대회 준비를 주도했다.

대회에는 크라스노쉐코프와 김알렉산드라도 참여하였으며, 이동휘·김립을 비롯하여 신민회·광복단·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 등 단체들에서 이동휘와 활동을 함께 한 인물들이 대부분 참여했다. 대회는 김알렉산드라가 국제정세와 한인혁명가들의 당면과업에 대해 보고하였고, 이동휘가 러시아의 볼쉐비키당과 같은 조선의 무산계급정당을 조직하여 조선민족해방운동을 볼쉐비즘의 방향으로 이끌어가자고 제안했다. 대회참가자들은 이동휘의 제안인 러시아볼쉐비키혁명과 조선독립운동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우파그룹은 부르조아민주주의적 또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던 인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순수 독립운동만을 위한 ‘광의단(光義團)’을 조직하고, 극동인민위원회로부터는 후원만을 얻자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동휘의 제안에 찬성하는 좌파그룹 다수파는 볼쉐비즘에 찬동하고 조선혁명을 그 길로 촉진하자고 주장하여 볼쉐비키세력과 밀접한 연대를 강조하였다. 이동휘의 제안과 볼쉐비키세력의 주장에 지지입장을 지녔던 좌파그룹의 이동휘·김알렉산드라·유동렬·박애·이한영·김립·오성묵·오하묵·이인섭·유스테판·오와실리·임호·전일·박이반 등이 한인사회당을 발기하였다.

1918년 하바로프스크 회합은 한인사회는 물론 아시아지역에서도 최초의 공산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의 창당을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동휘가 신민회와 조직적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한 회합이기도 했다. 또한 이 대회참가자들 중에는 노·중령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광복단 단원들이 많았고, 이들 역시 대회에서 분열된 입장을 보였다. 이동휘는 신민회 다수파들의 동의를 얻어내는데 실패하였으나 대회의 다른 참석자들의 대다수 지지를 얻었다. 이들은 대부분 김립·김하구·장기영·최태열·임호·전일 등과 같은 이동휘의 오랜 측근인물들을 비롯하여 김알렉산드라의 지도로 우랄지방과 하바로프스크지역에서 친볼쉐비키 활동을 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한인사회당을 발기한 한인혁명가들은 1918년 4월 28일(러시아구력) 한인사회당의 정식창립을 위한 한인사회당중앙위원회 확대총회를 개최하고 중앙간부를 선출하였다. 대회는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연대와 반일反日·반제反帝의 사회주의노선을 내용으로 하는 한인사회당의 강령을 채택하는 한편 중앙위원들을 선출하였으며, 조직·선전·군사 등 주요부서를 설치하였다.

기능과 역할

한인사회당의 창당 간부로는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박애(박 마다베이), 선전부장 전일, 비서부장 박진순, 정치부장 이한업, 교통부장(연락책) 김립 등이 선출되었다. 1918년 4월28일(러시아력) 한인사회당 정식 창립을 위한 한인사회당 중앙위 확대총회가 개최되어 중앙간부들이 선출되었다. 총회는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연대, 반일-반제 사회주의 노선을 골자로 하는 한인사회당 강령을 채택하고 중앙위원 선출했으며, 주요 부서 책임자들을 선임했다. 한인사회당의 출판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극동인민위원회가 석판기계와 인쇄비, 종이 등을 제공하여, 한인사회당 기관지인 자유종이 발행되었다.

한인사회당은 장교훈련을 위한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군사부장인 유동렬이 군사학교장을 겸임토록 했다. 김 알렉산드라를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주둔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 사업을 전개했다.

한인사회당은 적위대 활동에도 착수했는데, 일본이 1918년 4월 5일 일본인 살해 사건을 빌미로 육전대를 블라디보스톡에 상륙시키자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공동대처하기 위한 대책으로 다양한 세력들과 대일공투를 협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인사회당은 극동인민위원회의 승인과 지원하에 여러 지역에 한인사회당 간부들을 파견하여 적위대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1918년 5월 이후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선의 주요도시들에서 체코군이 반볼세비키 봉키를 일으켜 볼세비키 정권을 붕괴시키고, 6월 28일에는 블라디보스톡의 체코군 군대가 봉기함으로써 극동러시아의 볼세비키 정권도 붕괴되었다. 이후 한인사회당은 하바로프스크에 집결하여 대책을 논의하여, 한인사회당의 전일, 유동열등이 100명의 조선인 적위대롤 이끌고 러시아 적군과 함께 우수리전투에 참가하여 연합군과 합세한 칼뮈코프 백군과 싸웠다. 이 전투에서 한인 적위대원들은 절반 이상이 전사했고, 1918년 8월말 하바로프스크의 볼세비키들이 빨치산 체제로 전환을 결정한후 아무르주로 이동하던 중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흑룡강에서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로 압송되었는데, 이 가운데 전일, 유동열, 이인섭 등은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하여 석방되었지만, 김 알렉산드라는 백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동휘 등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집결해 기회를 보아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의 지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사회당의 대표자대회를 열어, 박진순·박애·이한영 3명을 사절단으로 뽑아 소련 코민테른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 3명은 모스크바에 가서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선언하고, 한인사회당 당원 명부를 코민테른당국 제출하여 상당한 규모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받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해로 왔으며,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던 박진순 등의 사절단은 이르쿠츠크에서 자금피탈사건을 겪고 상해로 와 다시 모이게 되었다. 1920년 중엽 이동휘는 소련과의 관계강화를 통한 무장투쟁을 위해 임시정부의 전면개편을 주장했다. 이것이 거부되자 이동휘 등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한편, 1921년 5월 이르쿠츠크파는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 보리스 슈미야츠키의 지원 아래 제1차 고려공산당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이동휘, 김립, 박진순 등 한인사회당 간부는 박애, 계봉우, 장도정, 권화순, 김진 등과 연합하여 상해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고려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의의와 평가

한인사회당은 1918년에 이동휘(李東輝)가 중심이 돼 조직한 한국 최초 사회주의 정당으로, 이동휘는 1917년에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소련체제가 출범하게 되자, 혁명을 이끌어낸 소련에 대한 옹호와 협조가 곧 조선독립 달성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사회주의 정당 창설에 나섰다. 10월 혁명이후 당시 러시아의 급격한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과정속에서 한인사회도 분화와 대립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인사회당은 10월 혁명으로 집권한 소비에트 권력만이 토지문제, 한인 노동자들의 합법적인 지위 개선을 가져올수 있다고 보고, 소비에트 정부의 지지와 승인을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 전반에서 확산시키기 위해 전로한족회의 중앙위원회를 개설토록 했고, 중앙회 본부를 소비에트 볼세비키의 본거지인 하바로프스크로 이전을 시도했지만,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는 한인 집단인 원호인 중심의 다수파가 헌법제정의회, 시베리아 지방의회 지지를 주장함으로써 이는 좌절되었다.

한인사회당은 1918년 6월 13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에서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인인 여호인 빈농, 소작농 대표들의 지지를 받았으니, 이들의 지속적인 회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숫적인 열세는 심화되었으며, 대회 종료 시점인 6월 22일, 23일 실시된 전로한족중앙총회 주요 간부 선출에서 한인사회당 당원들은 대회 초반 대회 진행간부로 이동휘, 김립, 박 이반, 오 바실리, 유 스테판등이 활동했지만, 최종적으로 선출된 새로운 간부진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한인사회당은 이동휘를 중심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소련 코민테른에 가입함으로서 상당한 규모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받기도 했지만, 결국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에 일시적으로 합류했다가 기존 임시정부 구성원들과의 노선차이로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하고 활동을 이어나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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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사회당의 조직과 활동(1918-1920)」(반병률, 『한국학연구』5, 인하대한국학연구소, 1993)
「韓人의 共産主義運動 70年 ; 韓人社會黨에서 韓國民族民主戰線에 이르기까지」(이명영, 『사회과학』29, 성균관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1988)
집필자
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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