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춘선(具春先)은 1857년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美浦面) 풍인동(豊仁洞)에서 출생하였다.
구춘선은 1878년부터 북간도로 이주하기 전까지 군인으로 궁궐의 수비장을 지냈다. 1899년 만주 왕청현(汪淸縣)으로 이주하여 한국인을 계몽하는 데 앞장섰다. 그곳에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인 그리어슨(Robert Grieson, 한국명 구예선)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1906년 집사 이보연과 함께 용정시교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에 김영학(金永鶴) · 김약연(金躍淵) 등과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를 설립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으며, 1913년 간민회의 발기인으로 활약하였고 분회장이 되었다. 1911년 이동휘가 세운 길동기독학당(吉東基督學堂)의 간사로 재직하면서 교육운동에 관여하였다.
1919년 3월 용정(龍井) 시내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는 왕청 · 연길(延吉) · 화룡(和龍) · 혼춘(琿春) 등 각 현 대표들과 조선독립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구춘선 등은 조선독립기성회를 대한국민회(북간도 국민회)로 개편하고 구춘선이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간도의 다른 단체와 달리 국민회는 임시정부 소속 단체였다. 국민회는 중앙 본부를 두고 지방회와 130여 개소의 지부를 두었다.
1920년 국민회 안에 군사부를 두고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여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구춘선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정부에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광복단, 대한신민단 등 북간도 지역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총판부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간도참변(間島慘變)으로 러시아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은 뒤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0년 6월 국민회 소속 독립군은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며, 그 뒤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하였다. 1921년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고, 독립운동 단체인 총합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 활동에 매진하다가 1944년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구춘선의 공훈을 기려 199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