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3월에 북간도에서 민족 교육을 목적으로 조직된 한인단체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가 이주 한인의 자제들에게 민족 교육을 시행하고자 연길현(延吉縣) 소영자(小營子)에 설립하였다. 간민교육회는 1909년 간도협약(間島協約)이 체결된 직후 박무림(朴茂林) 등이 조직한 한민자치회(韓民自治會)와 한민교육회(韓民敎育會)의 전통을 이어받아, 1910년 3월에 이동춘(李同春, 1872∼1940), 이봉우(李鳳雨, 1873∼1921), 윤해(尹海, 1883∼?) 등이 한인 자제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학교 설립은 김립(金立, ?∼1922)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종호(李鍾浩, 1885∼1932)가 제공한 자금과 학교설립 계획을 갖고 오면서 가능하였다.
이 학교에는 중학과에 법률정치과를 두었으며, 여자야학교와 소학교를 따로 설립하였다. 교장은 간민교육회 회장인 이동춘이 맡았으며, 간민교육회 핵심간부 13명이 교사와 실무자로 활동하였다. 김립은 학감 겸 교사로 윤해와 함께 법률정치과를 담당하였고, 계봉우(桂琫禹)가 역사와 지리를 담당하였다. 그 외에 윤해, 장기영(張基永), 오영선(吳永善), 김하석(金河錫), 문경(文勁) 등이 교사, 정현설(鄭賢卨)이 재무, 구춘선(具春先), 이봉우, 이남원, 황원호(黃元浩)가 간사, 박춘서(朴春瑞)가 식당 주임으로 참여하였다. 당초 둔전제(屯田制)로 운영하여 자립 경영을 목표로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 때문에 설립 1년도 안되어 법률정치과가 폐지되었고 2년이 못되어서는 중학과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6개월 과정의 사범속성과를 설치하여 졸업생들을 배출하면서,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 민족 학교에서 필요한 교사들을 양성하였다.
길동기독학당은 북간도 국자가(局子街)에서 5㎞ 정도 떨어진 소영자에 위치하였다. 광성학교(光成學校)라고 불린 이 학교는 한인들 사이에서는 북간도 교육계 가운데 최상의 학교로 알려졌다. 학생들은 대체로 15∼25세의 청소년들이었는데, 북간도를 비롯하여 국내와 연해주에서 왔다. 교과목은 한국어, 한국사, 한국지리 등으로, 민족 교육을 비롯하여 독립군 양성의 기초가 될 병식 체조와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철저한 반일민족교육을 받은 졸업생은 졸업 후에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 각지의 반일민족단체에 참여하였고, 특히 3·1운동 당시와 그 이후 독립군 활동 등 항일민족운동에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