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협약 ()

근대사
사건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국이 간도에 관해 체결한 협약.
이칭
이칭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내용 요약

간도협약은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국이 간도에 관해 체결한 협약이다. 청나라는 간도 지역을 자국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역으로 선포하고 이주를 엄금했다. 이후 간도 지역은 불모지로 변했고 국경상의 경계도 모호해지면서 많은 외교적 문제를 낳았다. 이에 조선과 청은 1712년 국경문제를 확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했으나 ‘동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것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라 분쟁의 여지를 남겼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간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인정하던 일본은 남만주 철도부설권 등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국에 넘기는 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했다.

키워드
정의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국이 간도에 관해 체결한 협약.
개설

간도 지역은 고구려발해의 옛 땅이다. 발해 멸망 후에는 거란족이 건국한 요의 영역이었다가 원-명-청을 거치면서 그 지역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특히 여진족에 의해 청이 건국된 이후 청국 조정은 간도지역을 자국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선포하고, 사람의 이주를 엄금하였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불모지처럼 방치되어 오다가 때로는 국경을 넘어 온 양국의 유이민이 몰래 땅을 개간하기도 하였고, 경계도 모호해지고 말았다.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도 지역에 대한 조선과 청의 교섭이 시작된 것은 1712년(숙종 38)이다. 당시 양국 대표들은 백두산을 답사하여 현지 조사를 마친 뒤 국경을 확정한다는 의미에서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했다. 비문에는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土門江)의 분수령에 경계비를 세우는 것[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것으로 명기하였다.

그러나 후일 간도의 귀속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여기에 내재해 있었다. 양국 대표가 합의한 토문강의 위치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두만강의 상류라는 것이 청국 측 입장이었던 반면, 조선 측은 만주 내륙의 송화강(松花江) 상류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정계비가 건립된 뒤 160여 년 간 간도귀속 문제는 유보되어 왔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이후 간도의 귀속 문제로 논란이 다시 발생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특히 철종 말년부터 자연 재해로 생활이 어려워진 조선인들이 점차 그 지역에 이주하여 농경지로 개척하였고, 청국 측도 봉금을 해제하여 자국 사람들의 이주와 농경을 장려하였기 때문이다.

1882년 초 청나라는 간도지역을 자국 영토로 여겨 조선인의 월경을 엄금하도록 조선 정부에 요구했고, 1883년에는 간도의 조선인을 소환하라는 요청을 해왔다. 이때 조선 측은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이며, 간도지방은 조선 영토임을 주장하면서,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통해 국경을 확정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청나라는 1885년에 간도 지역의 조선인을 강제로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다시 토문감계(土門勘界)를 요청함으로써 간도의 귀속 문제는 양국간에 새로운 외교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3년에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는 한편, 서울 주재 청국공사에게 간도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제하였다. 이후 등장한 통감부는 간도지역에 통감부 출장소를 두어 그곳을 대한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던 일본은 1909년 9월 4일 남만주의 철도부설권 등을 얻는 대가로 간도 지역을 청국 측에 넘겨주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간도협약이다. 이처럼 간도협약은 대한제국 정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이 불법적으로 간도를 청국에 넘겨준 조치였다.

역사적 배경

1712년(숙종 38)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된 이래 160여 년 간 간도의 귀속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나 1881년 청나라가 봉금(封禁)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이주와 개간을 장려하면서 간도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였다.

간도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제1차 회담인 을유감계회담(乙酉勘界會談, 1885)은 우리 측의 제안으로 1885년 11월 회령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정해감계회담(丁亥勘界會談, 1887), 1888년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이중하(李重夏)를 감계사(勘界使)로 파견하여 회담을 끈질기게 추진하였으나 양측의 평행선을 그은 입장 차이로 인해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했다.

청나라는 두만강 상류를 투먼강[圖們江]으로 보고 정계비의 토문강이 곧 투먼강, 즉 두만강(豆滿江)을 가리킨다고 강변했기 때문이다. 한편 청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 한 뒤 한국 측은 청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모색함에 따라 간도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게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897년 이후 2차례 상세한 현지답사를 통해 간도뿐만 아니라 연해주까지 우리 국토임을 확신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에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토록 조처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측과 충돌이 잦아지면서 대한제국 정부는 분쟁의 확대를 꺼려 1904년에 이범윤을 소환했다. 그러면서 양국은 선후장정이라는 잠정적 문서를 통해 정확한 감계가 있을 때까지 종래와 같이 투먼 강을 경계로 각자의 영지로 삼고 불법 월경하지 않을 것을 약정했다.

경과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이 청나라에 대하여 전쟁기간에 감계문제의 재개중지를 종용하였으므로 감계문제는 중단되었다. 그 후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7년 간도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므로 간도 거주 한국인은 청나라 정부에 납세의무가 없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대륙침략의 발판을 얻기 위해 1909년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撫順) 탄광 개발권을 얻는 대신,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간도의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률 관할 하에 두어 납세와 행정상의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간도협약을 맺었다.

결과

간도협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두만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상류는 정계비를 지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 국경을 삼는다.

둘째, 용정촌 · 국자가(局子街) · 두도구(頭道溝) · 면초구(面草溝) 등 네 곳에 영사관이나 영사관 분관을 설치한다.

셋째, 청나라는 간도 지방에 한민족의 거주를 승준(承准)한다.

넷째, 간도 지방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권(法權) 관할 하에 두며, 납세와 행정상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

다섯째, 간도 거주 한국인의 재산은 청국인과 같이 보호되며, 선정된 장소를 통해 두만강을 출입할 수 있다.

여섯째, 일본은 길회선(吉會線: 延吉에서 會寧間 철도)의 부설권을 가진다.

일곱째, 가급적 속히 통감부 간도 파출소와 관계 관원을 철수하고 영사관을 설치한다.

앞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은 간도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간도지역이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인정하였었다. 그러나 간도협약을 통해 일본은 불과 2년 사이에 자국의 전략적 이해에 따라 간도의 영유권 인식을 한국에서 청국으로 뒤바꾼 셈이자, 대한제국 정부의 의사와 무관하게 간도지역을 청국에 넘겨버린 셈이다.

이로써 1881년부터 다시 재개된 청 · 한 양측의 간도 영유권 문제는 일본의 군사외교 책략과 청국의 타협으로 미봉되어 미래 한 · 중의 갈등 요소로 남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1909년의 간도 협약은 당사자인 대한제국 정부가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취해진 한국 영토의 할양이다. 간도 협약에 의해 일제는 안봉철도(安奉鐵道)의 개설 문제, 무순(撫順) · 연대(煙臺)의 탄광 문제, 영구지선(營口支線)의 철수 문제, 관외철도(關外鐵道)의 법고문(法庫門) 연장 문제 등 만주에서의 몇 가지를 교환하는 조건으로 중국에 간도를 할양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오랜 동안 한청 양국 사이에 귀속 문제를 두고 논란이 되어 온 간도는 이후 한국의 관할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간도협약은 한국의 위기 상황을 이용한 일본과 청국의 불법행위이며, 협약 내용 자체가 양국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역사적 문증이라고 평가된다. 따라서 간도의 귀속 문제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여전히 미해결 현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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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영유권에 관한 연구』(신기석, 탐구당, 1979)
『日本外交史年表竝主要文書』
『日本外交史辭典』
『白頭山定界碑』(篠田治策, 東京:樂浪書院,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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