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경장 당시의 집권관료들에 의하여 민권옹호와 정치개선의 촉진이라는 강령하에 개화독립운동 추진의 일환으로 조직되었다.
당초 40여인의 평의원 및 간사들이 서울 계동의 직조국(織造局)에 모여 김윤식(金允植)을 부회장으로 하고, 2월 23일 발기대회를 가지기로 한 바 있다. 그러나 2월 11일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김홍집(金弘集)내각이 무너졌으며, 주요인물인 유길준(兪吉濬)이 일본에 망명하고 김윤식이 제주도에 유배됨에 따라 건양협회는 사실상 유산되고 말았다.
한편, 당시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갑오경장을 추진하던 정부로부터 신문창간사업의 지원을 받고 있던 서재필(徐載弼)은 아관파천 이후 새로 수립된 내각으로부터도 계속적인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의 발간사업을 추진하게 되었고, 이어 독립협회의 창립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건양협회의 남은 인사들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정양(朴定陽)·안경수(安駉壽)·한규설(韓圭卨)·김가진(金嘉鎭)·김종한(金宗漢) 등이 정동구락부의 주요구성원인 민영환(閔泳煥)·이완용(李完用)·이채연(李采淵) 등과 함께 계속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까닭에, 독립협회 창립의 기반을 건양협회와 정동구락부 및 기타 제3의 개화파관료 등 3개의 흐름에서 파악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건양협회 자체의 존속이 3일 정도에 불과하였고, 여타의 활동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협회의 구체적인 조직과 인적 구성을 분명하게 밝히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