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라-태프트협약은 1905년 7월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가 도쿄에서 대한제국과 필리핀에 대한 이해를 놓고 상호 구두로 양해한 합의이다.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통치상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 확립을 인정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러일전쟁 후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이 불안정한 상태의 일본과, 전후 필리핀 군도에 대한 일본의 야심을 우려하던 미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성립된 일종의 ‘구두 양해’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는 과정을 착실히 밟아 나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강화회담에 앞서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에 대해 양해를 구해 두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은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협약’을,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소기의 장치를 마련하였다고 주장한다.
이중 이른바 ‘가쓰라-태프트협약’의 골자는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의 의도도 갖지 않는다. 미국은 일본이 한국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의 평화에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통치상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인정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1905년 7월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종전이 임박하면서 강화회담이 개최되기 직전의 시점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국력이 피폐하고 자원이 고갈되어 과연 전쟁 종결 이후 한국에 대한 보호권의 확립이 가능할 것인가를 놓고 전전긍긍하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세계의 강대국, 특히 영 · 미 양국의 지원을 기대하였다.
한편 미국은 러일전쟁 중 일본에 호의적인 입장으로서, 전비 조달을 위한 일본의 공채 모집에 응하기도 했고, 전후에는 일본이 태평양 지역의 미국 영토, 특히 필리핀 군도에 대한 침략의 야심이 있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이런 양국의 입장이 자연스레 접근되어 일본은 한반도에 대해, 미국은 필리핀에 대해 자국의 이해 확립을 위한 일종의 ‘구두 양해’를 성립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요동반도의 여순 및 대련 전투 승리에 이어 대마도해전의 승리를 통해 러시아함대가 궤멸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귀착될 것이 분명하였다. 이때 영국은 제1차 영일동맹을 갱신하고자 하였고,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 · 일의 강화회담을 주선하고자 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필리핀의 초대 총독을 역임한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가 필리핀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을 경유하여 가도록 지시하였다.
1905년 7월 27일 도쿄에 들른 태프트는 가쓰라 타로[桂太郞] 일본수상을 예방하게 되었다. 이때 가쓰라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그의 의견을 물었다. 즉 “한국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전쟁의 논리적 귀결로서 한반도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필요하다.
만일 전후에도 한국을 그들에게 맡겨 둔다면 이 나라는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분명 국제적 분규를 거듭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은 한국이 종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가 일본이 또 다시 전쟁으로 돌입할 상황에 처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확고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모종의 조치에 대해 미국이 양해를 해 달라는 뜻이었다. 이 때 태프트는 자신의 개인적 의견이라면서 “일본의 동의 없이는 어떤 대외조약도 체결하지 말라고 한국에 요구할 정도의 보호를 일본군을 이용하여 확립하는 것이 전쟁의 논리적 귀결이자 동아의 항구적 평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답했다고 전해진다.
태프트는 가쓰라와의 대화 내용을 신임 국무장관 루트(Elihu Root)에게 7월 29일부로 보고하였고, 휴가 중이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는 7월 31일부로 전달되었다. 루스벨트는 “귀하의 가쓰라와의 회담은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옳다. 나는 그대가 한 모든 말을 확인했다는 것을 가쓰라에게 전해주기 바란다”고 회답하였다.
마닐라에 도착한 태프트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이 같은 승인 사실을 8월 7일부로 일본의 가쓰라 수상에게 전했고, 이것이 이른 바 ‘가쓰라-태프트밀약’의 전모이다.
이 사실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약 20년이 지난 1924년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이 그 메모를 발견하여 논문으로 발표함으로써 미 · 일 양국의 ‘외교적 흥정(quid pro Quo)’으로 알려져 거의 정설화 되었다.
그러나 1959년 레이먼드 에스더스(Raymond A. Esthus)는 태프트가 외교적 흥정을 위해 일본에 파견된 밀사가 아니었고, 동 메모가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 미국 극동정책의 핵심도 아니었다고 반론을 제기하여 해석상 논란이 제기되어 오고 있다.
‘가쓰라-태프트협약’은 ‘태프트-가쓰라각서’ 등으로 불리면서 국가간의 공식적인 ‘협약’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결코 조약이나 협약 · 협정이 아니며 국제법상 구속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즉, 미국과 일본이 상호 통고한 ‘기록’ 내지는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um)’을 ‘협정(agreement)’으로 오해한 데서 나아가 일본 언론(『國民』誌)의 과장된 선전 등으로 확대 해석되고, 유추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그 해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드 강화조약의 결과가 일본의 외교적 실패로 알려지면서 “전쟁에 이기고도 강화조약에서 패했다”는 일본 국내의 비판 여론에 궁지에 몰린 가쓰라 내각이, 태프트-가쓰라 사이의 대화 내용을 커다란 외교적 성공으로 부풀리고 여론을 조작한 결과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해석상 차이가 있지만, 일본과 미국이 한국과 필리핀이라는 지역을 상호 특수 영역으로 인정하여 장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양국 간 충돌을 예방하면서 각기 타협을 추구한 결과이다. 이것은 이후 ‘제2차영일동맹(8 · 12)’, ‘포츠머드강화조약(9 · 5)’을 거쳐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해 가는 과정의 한 단계 조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