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머스 조약은 1905년 9월에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강화조약이다. 러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막대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된 일본과 계속 패전하고 있는 러시아가 미국의 중재로 15차례 회담 끝에 체결하였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자유처분권을 확보하고, 사할린의 남쪽 부분을 할양받는 등 일본의 승리를 확인하는 5개 사항에 합의하였다. 미국과 가쓰라-테프트 비밀협정을 체결한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는 등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안정적으로 확약받게 되었다.
1905년 8월 9일부터 미국 뉴우햄프셔주에 있는 조그마한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종전협상을 거듭하여 1905년 9월 5일 크게 다섯 가지 사항을 합의한 강화회담이다. 사실상 일본의 승리를 확인한 조약이었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일본군이 중국 여순(旅順)의 러시아 해군기지를 기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쟁은 1905년 1월 봉천(奉天)전투와 5월의 동해해전에서 일본군이 러시아군에 승리하면서 일본이 승세를 잡았다.
일본은 유리한 전쟁 상황을 활용하여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러시와의 강화를 알선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막대한 재정 부담을 지고 있었고, 봉천전투 이후 더 이상 북진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처지였다.
러시아도 일본군에 계속 패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와 독일을 상대로 전쟁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발행한 외채부담이 가중되는 등 재정난에 직면하였다. 더구나 1905년 1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실시를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에 대해 군인이 발포하면서 수백 명이 죽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시위는 이즈음부터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가 통치하는 짜르체제를 위기에 빠뜨렸다(제1차 러시아혁명). 이에 반해 일본은 지도층만이 아니라 국민의 여론도 분열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측 전권수석대표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외상이었고, 러시아측 수석 대표는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Sergei Yulievich Vitte)였다. 양측간 회담은 모두 15회 열렸으며, 회담 도중 양측은 전쟁 상황을 고려하며 미국의 언론을 동원하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일본은 끝까지 관철해야 할 강화조약의 절대적 필요조건으로 첫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자유처분권을 러시아가 승낙하고, 둘째, 일정 기한 내에 러시아군이 만주에서 철수하며, 셋째, 랴오둥반도의 조차권 및 하얼빈에서의 여순 간의 철도를 일본에 양도할 것을 내세웠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서는 거의 승낙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생각하고 있던 강화조약에 따른 비교적 필요조건 곧, 사정이 허락하는 한 관철을 시도한다는 조건 가운데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지불받고, 사할린섬을 할양받는다는 사항을 러시아가 완강히 거부하면서 회담이 난항에 빠졌다.
교착상태에 빠진 회담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니콜라이 2세를 설득하여 사할린의 남쪽 부분을 할양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측에 유리하도록 중재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일본은 주요 열강으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안정적으로 확약받기 위해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기 한 달 전인 7월에 미국과 ‘가쓰라-테프트 비밀협정’을 체결하였다.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인 8월 12일에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두 차례의 약속을 통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였고, 영국과 공수동맹을 체결하였다.
1905년 9월 5일에 조인된 회담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 보호 감리조치를 승인한다.
러시아는 중국의 동의를 조건으로 러시아의 관동주 조차지와 장춘 여순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
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 남쪽을 일본에 양도한다.
러시아는 동해, 오호츠크해 및 베링해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강화조약은 일본이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했음을 확인해 준 조약이었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제1강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권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일본이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대한제국에 강요할 수 있었던 힘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만주 침략을 위한 확실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