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무렵은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에 이르는 중간 시점이다. 이 시기에 아직 러·일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본격적인 군사적 충돌에 돌입하지는 않았지만, 양국은 각기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면서,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각종 정보수집 경쟁을 치열히 전개하고 있었다. 이 모두는 아울러 다가오는 러·일 간의 군사적 충돌을 예견하면서 양국이 한반도 내의 각종 지형이나 전략의 요충, 도로망, 인구와 농산물, 수산물, 심지어 군량에 필요한 우마와 미곡의 물량까지 파악해가는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도 육해군 측에서 중요했던 전략적으로 주요한 군사기지 확보는 물론, 함대의 원활한 항행을 위한 석탄고기지와 조차지 획득 등이었다. 마산포조차사건 및 거제도조차문제는 이 과정에서 나타난 부산물이었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으로 청국 세력이 위축된 후, 한반도 내에 조차지 확대 및 새로운 개항장 설정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특히 마산항은 군사상의 중요성 때문에 공동조계지(共同租界地)의 경매, 토지매수를 둘러싸고 두 나라는 더욱 치열하게 대립했다. 그 결과 발생한 것이 마산포조차사건이고 그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 중 하나가 거제도조차사건이다.
1900년 3월 30일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Aleksandr Ivanovich Pavlow) 간에 마산포지소조차(馬山浦地所租借)에 관한 조러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마산포 거류지 외 10리 이내에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탄고(炭庫) 및 병원을 설립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어서 같은 날짜로 거제도 조차에 관한 한러조약도 체결했다. 이는 거제도 연안 및 주변의 섬들을 조선정부가 영원히 타국정부에게 조차, 매입, 상사설립 및 영업을 금지하는 것으로써 일본이나 제3국이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일본은 서울 주재 일본공사에게 훈령하여 어업 및 해산제조용 장소를 조선정부에 요청했다. 또한 거제도 전부 및 그 연안으로부터 10리 이내의 섬들을 일본 이외의 타국에 대여하거나 양여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한국정부에게 받도록 했다. 이에 러시아 공사는 고종에게 거제도에 대한 조차를 요구하지 않을 것을 밝히고, 타국 역시 거제도를 조차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음으로써 갈등이 종료되었다.
거제도조차사건은 마산포조차사건의 진행과정에서 부산물처럼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놓고 갈등을 벌이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다. 당시 러시아는 마산과 거제도를 러시아함대의 중간 기착지이자 연료공급지로 삼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해협을 거쳐 만주의 여순(旅順)·대련(大連) 사이의 통항을 용이하게 하고자 하였다. 러시아로서는 동아시아지역에서의 남하정책(南下政策)의 일환이자 블라디보스톡 함대의 원활한 통항을 위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와 만주로 진출을 목표로 삼고 있던 일본의 항의와 견제로 이 모든 기도는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