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후경(厚卿), 호는 규당(圭堂) · 탄재(坦齋). 현감 이인식(李寅植)의 아들이다.
좌랑(佐郎)으로서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885년 공조참의 · 안변부사가 되었다가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서 청국측 대표 덕옥(德玉) · 가원계(賈元桂) · 진영(秦瑛) 등과 백두산에서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지계(土門江地界)를 심사하였다. 국경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였으나 견해차가 심한데다 청국측이 강압적인 태도로 나와 회담은 실패하였다.
1886년 덕원항감리(德源港監理)가 되었다가 1887년 다시 토문감계사가 되어 회담을 재개했는데, 청국측이 조선측의 주장을 거절, 위협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며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1890년 이조참의가 되어 충청도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4년 외무부협판 · 의정부도헌이 되었고,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선무사(慶尙道宣撫使) · 영월영천안핵사(寧越永川按覈使) · 경상도위무사(慶尙道慰撫使)로 진압에 앞장섰다. 이 해 말 김홍집내각의 내무부협판이 되어 갑오농민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이듬해 김홍집내각이 무너지고 지방제도가 개편되자 대구부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관찰사 재직시 을미의병 봉기로 많은 관리가 희생되었으나 이중하는 민심을 얻어 무사하였다.
1898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요구로 성립된 중추원에서, 무기명투표로 11명의 대신후보자를 선출할 때, 2위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1903년 외무부협판 칙임2등(勅任二等)이 되어 문헌비고찬집당상(文獻備考纂輯堂上)을 맡았다. 그 뒤 평안남도관찰사 · 경상북도관찰사 ·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대한제국과 일본의 '정합방론(政合邦論)'을 주장하자 민영소(閔泳韶) · 김종한(金宗漢) 등과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을 조직하여 그 해 12월 5일 원각사(圓覺社)에서 임시국민대연설회를 열고, 그 주장이 부당함을 공격하였다. 또, 1910년 규장각제학으로 한일합방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지방관리 재직시 청렴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규당문집』 · 『감계전말(勘界顚末)』 · 『감계일기(勘界日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