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병 ()

유인석의격문/재격백관문/을미의병
유인석의격문/재격백관문/을미의병
근대사
사건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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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목차
정의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
내용

청일전쟁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시해사건단발령의 강제시행에 분격한 유생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 아래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일으켰다.

1895년(고종 32)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뒤이어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보수유생들은 ‘토역소(討逆疏)’ 등을 바쳐 친일정부의 폐위조처에 반대함은 물론, 일본군을 토벌, 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하였다. 8월 22일 서울 창의소(倡義所)에는 고시문이 나붙기 시작하고, 10월 중순을 전후로 충청남도 회덕 · 유성 · 진잠 등지에서는 문석봉(文錫鳳) 등이 토적(討賊)의 뜻을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친일정권이 공포, 시행한 단발령은 유생들과 일반백성의 반일 · 반정부 기운을 더욱 고조시켰다. 1896년 1월 중순 경기 · 충청 · 강원도 등 각 지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난 의병항쟁은, 2월 상순에는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 그리고 함경도 북부까지 확대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을미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갑오경장의 새로운 법령을 시행하는 관찰사 · 군수 혹은 경무관 · 순검 등을 친일파로 지목하여 처단하거나 문책하고, 또 그들을 진압하려는 관군 및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아울러 전선 · 철도 등 일본군의 군용시설을 파괴하거나 일본군 주둔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경기도에서는 이천과 여주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1월 15일을 전후로 봉기하여 남한산성 서남일대에서 세력을 떨쳤다. 그 뒤 두 지역의 의병이 통합하여 2,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박준영(朴準英)이 대장, 김하락(金河洛)이 군사 겸 도지휘(軍師兼都指揮)가 되었다. 2월 25일 의병부대가 남한산성에 입성하자, 안성 의병 수 백명과 춘천 의병 3,000여 명도 남한산성으로 집결한다는 소문으로 친일정부를 긴장시켰다.

강원도 춘천에서는 이항로(李恒老) 문인 이소응(李昭應)이 의병 1,000여 명을 규합하여 춘천부를 점거하고 관찰사 조인승(曺寅承)을 처치하였다. 강릉에서는 여주 유생 민용호(閔龍鎬)가 원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활동함으로써 의병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영동 9 군창의진(嶺東九郡倡義陣)이 편성되었다.

충청도 홍주에서는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 · 이설(李偰) · 안병찬(安炳瓚) 등이 기병하여 한때 그 일대를 지배하였고, 제천에서는 유인석이 그의 문인 서상렬(徐相烈) · 이필희(李弼熙) 등과 함께 기병하여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을 편성하였다. 그 뒤 창의진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일부 의병과 합류하면서 병력이 4,00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체포하여 처치한 뒤 충주부를 점거하여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단하였다. 이때 유인석은 〈격고내외백관 檄告內外百官〉이라는 격문을 공포하여 나라의 모든 관리들은 친일행위를 중지하고 의병을 후원하여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호좌창의진이 충주부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각처 의병들의 기세가 높아지고 충주부로 몰려오는 의병도 늘었다.

경상도의 경우 산청에서는 곽종석(郭鍾錫) 등 200명의 유생이 의병진을 편성하여 안동부를 점령하고 권세연(權世淵)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뒤 10여 일 동안 사방에서 모여든 의병이 무려 4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훈련을 받지 못한 의병들이었기 때문에 관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결국 안동부도 빼앗겼다.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許蔿) 등이 의병을 일으켜 금릉 등지를 점령하고 대구에 다다랐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해산하였다.

끝으로 전라도의 의병봉기는 다른 지방보다 약간 늦은 3월에 시작되었다. 나주의 기우만(奇宇萬) 등은 각처의 의병을 광주로 집결시켜 호남창의군을 편성하였으나 역시 관군의 공격을 받고 해산되었다.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 봉기에 당황한 친일정부는 여러 차례 조칙을 반포하고 선무사(宣撫使)를 파견하는 한편, 서울수비의 주력부대를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을 서둘렀다. 이 틈을 타서 근왕세력인 정동파(貞洞派)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친러정권은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친일내각의 요인들을 ‘역당(逆黨)’ 또는 ‘국적(國賊)’으로 단죄하고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이와 더불어 갑오년 이래의 동란(動亂)과 개혁으로 인한 경제파탄과 민생고의 극심함을 고려하여 그동안 적체된 각종 미수 · 미납의 공세(貢稅)를 일체 탕감한다는 조처도 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들은 의병 봉기의 대의명분을 없애버렸으며 그들을 해산시키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 결과 1896년 3월 이후 의병활동은 점차 쇠퇴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회유정책을 거부한 유인석과 민용호 부대는 만주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을미의병은 비록 ‘근왕창의’라는 왕조 중심적이며 위정척사론적인 사상적 한계성을 탈피하지는 못하였으나, 청일전쟁 중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동학농민운동에 뒤이어 임진왜란 이래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의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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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日義兵運動の歷史的展開」(姜在彦,『朝鮮近代史硏究』, 1970)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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