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희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유인석 의진에서 진동별모장으로 활동한 무신 · 의병장.
이칭
만여(萬汝)
실곡(實谷)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57년(철종 8)
사망 연도
1900년(고종 37)
본관
덕수(德水)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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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때, 유인석 의진에서 진동별모장으로 활동한 무신 · 의병장.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만여(萬汝), 호는 실곡(實谷). 서울 출신. 주로 단양 매포(梅浦)에서 살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8년 무과에 급제, 관직에 있던 중 변복령(變服令)이 내려지자 단양으로 퇴거하였다.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 유중교(柳重敎)가 1889년 제천에서 강학을 하자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존화양이(尊華攘夷) 정신을 배웠으며, 이어 1893년 유중교 사후에는 유인석(柳麟錫)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 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항일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자, 같은 문인인 이춘영(李春永)과 안승우(安承禹)가 1895년 11월 28일(음) 지평(砥平)에서 김백선(金伯先)의 포군(砲軍)을 주축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제천으로 들어가 군수 김익진(金益珍)을 몰아냈다.

제천에서 이춘영·안승우와 역시 동문인 서상렬(徐相烈)·신지수(申芝秀)·이범직(李範稷)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에 올랐다. 군사(軍師) 서상렬, 중군장 이춘영, 선봉장 김백선 등의 편제를 갖추고 전열을 정비한 뒤 12월 5일 단양으로 진군, 군수 권숙(權潚)을 구금하고, 같은 달 8일 공주병참 소속의 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영월로 퇴각하자, 같은 달 15일 이 곳에서 유인석이 총대장에 올랐고, 제천의병의 본격적인 활동이 개시되었다. 이 때 진동별모장(鎭東別募將)에 임명되어 유치경(兪致慶)·정화용(鄭華鎔) 등과 함께 서북지방으로 파견되어 강병모집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못하자, 중국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송상규(宋尙奎)·유치경 등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계획도 실패하자, 취푸[曲阜]로 가 공자상(孔子像)을 봉안하고 돌아왔다. 그 뒤 유인석의 명을 받고 성묘(聖廟)를 건립할 장인(匠人)을 구해 팔왕동(八王洞)으로 돌아오던 중 1900년 3월 흥도진(興道津)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해 죽었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의암집(毅菴集)』
『습재집(習齋集)』
『항재집(恒齋集)』
『취정록(就正錄)』
『독립운동사자료집』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독립운동사』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의암 유인석의 위정척사운동」(박민영, 『청계사학(淸溪史學)』3, 1986)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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