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순명(舜命), 호는 복암(復菴).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이조익(李祖益), 어머니는 광산김씨이며, 뒤에 이조겸(李祖謙)에게 입양되었다.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점차 득세하고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죄를 입게 되자, 1878년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매국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1889년 전시(殿試)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고, 이듬해 4월 신정왕후(神貞王后)의 곡반(哭班: 國喪 때 곡을 하던 벼슬아치의 반열)에 나아가 교리·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8월에 인산옥책차비관(因山玉冊差備官)으로 뽑혀 사헌부지평을 제수받았다.
1891년 수찬·부수찬 겸 서동학교수(副修撰兼西東學敎授)와 전시대독관(殿試對讀官)을 지냈다. 1894년 부응교·사복시정이 되었으나 곧 응교가 되었다. 이때 갑오농민봉기가 발생하자 폐정개혁을 위한 5개조의 상소를 올렸다. 이어서 일본의 간섭에 의해 갑오개혁이 이루어지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뒤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이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시해사건이 일어나자 동지 김복한(金福漢) 등과 함께 홍주목(洪州牧) 이승우(李勝宇)를 설득하여 홍주성을 거점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런데 호서일대의 각 의진을 불러들이고, 또한 간부들이 소모활동을 위해 성을 비운 틈에 이승우가 관군과 내통하여 군대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김복한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로써 1차 홍주의거는 실패하고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국왕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1904년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분격하여 전국에 토왜격문(討倭檄文)을 돌려 반대운동을 펼쳤다. 내부대신 이용태(李容泰)의 주선으로 안주군수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였다.
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홍주일대의 지사들을 모아, 2차 홍주의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병이 깊어 무력투쟁에 한계를 느끼자 김복한과 함께 상경하여 일본을 규탄하고 을사조약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 뒤 석방되어 1906년 1월 고향으로 돌아와 국권피탈에 통분하여 식음을 전폐하여 자결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