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정책 ( )

개화당 주요 인물
개화당 주요 인물
근대사
개념
개화를 실행하기 위하여 1880년대에 정부 주도로 추진한 정책.
정의
개화를 실행하기 위하여 1880년대에 정부 주도로 추진한 정책.
개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된 뒤 조선은 근대 열강과의 통상 교섭이 확대되고 열강의 도전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국내외 정세변화에 대처하며 나라의 독립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려는 노력이 선각자들과 초기개화파 관료들 사이에 나타났다.

그들은 개항 이후의 정세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전통을 계승하면서 열강의 선진 과학 기술을 배우고,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부강한 근대 국가의 체제를 갖추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초기 개화정책의 움직임은 1878년부터 현저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열강의 약육강식의 정책 아래 늦게 출발한 개화정책은 수많은 시련에 부닥쳤지만, 우여곡절 속에서도 줄기차게 진전되어 많은 성과를 냈다. 1876년의 개항부터 1884년 갑신정변 직전까지의 개화정책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개화기 새 관제의 설치

개항 이후 국내외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국가 기구로는 부적합하였다. 즉, 대외통상의 새로운 과제에 적응하기 위한 정부 기구의 개편이 요청되었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는 이러한 새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 기구 개혁의 첫 출발이었다. 1880년 음력 12월(양력 1881년 1월) 설치된 통리기무아문은 종래의 의정부·육조기구와는 별도로 전혀 새로운 기구였다.

설치 목적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정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章程>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무(時務)를 강구하고 변통(變通)을 참작함을 전담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리기무아문이 처음 신설될 때에는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담, 관장하도록 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내외의 군국기무를 총지휘하는 기능을 담당했으므로, 대신 중에서 총리를 임명하고 지위를 특별히 높여 정1품 아문으로 정하고, 사무를 감독, 관장하게 하여 의정부와 마찰이 없도록 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그 뒤 세 차례의 개편이 있었다. 1차 개편은 1882년 11월 통리기무아문을 통리아문과 통리내무아문으로 분화시키고, 밑에 동문(同文)·군무(軍務)·통상(通商)·이용(理用)·전선(典選)·율례(律例)·감공(監工)의 7사를 두도록 하였다.

2차 개편은 1882년 12월 통리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개칭하고, 밑에 정각(征搉)·장교(掌交)·부교(富敎)·우정(郵政)의 4사를 두었다. 그리고 통리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개칭하고, 밑에 이용·군무·감공·전선·농상(農商)·장내(掌內)·농상(農桑)의 7사를 두었다.

이 때, 김윤식(金允植)·박정양(朴定陽)·어윤중(魚允中)·김홍집(金弘集)·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김명균(金明均)·변원규(卞元圭)·윤기진(尹起晉)·이원긍(李源兢)·윤치호(尹致昊)·이건호(李健鎬)·여규형(呂圭亨)·고영철(高永喆)·장박(張博)·김기준(金基駿) 등 초기개화파들이 크게 진출하였다.

그리고 1884년 10월 단행된 3차 개편으로 두 개의 아문 중, 통리군국사무아문은 의정부에 통합시키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만 남게 하여 기구가 축소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갑오경장때까지 지속되었다.

개화기 신식 군대의 창설

조선은 개항 전후 열강의 도전, 특히 두차례의 양요(洋擾)와 운요호사건 그리고 무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고압적 외교의 경험에 비추어 군사력의 강화가 시급함을 절감하고 군제개편과 신식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당시는 실제로 외교의 자주성 정도가 국가무력의 강약에 크게 좌우되었다. 일본을 비롯한 조선의 모든 인접 국가들이 최신식 무기로 장비를 갖추고 무력을 강화시켜 나가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조선은 군대를 하루속히 근대화하여 국가 방위의 힘을 기르는 것이 매우 시급한 과제라고 여기게 되었다.

정부는 먼저 1880년에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온 별군관(別軍官) 윤웅렬(尹雄烈)이 중심이 되어, 오영(五營)의 군문으로부터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1881년 4월 무위영(武衛營) 소속으로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다.

별기군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대로서, 근대식 소총으로 무장시키고 신식 군사 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종래 군제였던 훈련원·어영청·수어청·금위영·총융청의 오군영제를 무위영·장어영(壯禦營)의 이군영제로 개편하였다.

별기군의 교련소 당상(堂上)에는 민영익(閔泳翊), 정령관(正領官)에 한성근(韓聖根), 좌부령관(左副領官)에 윤웅렬, 우부령관에 김노원(金魯元), 참령관(參領官)에 우범선(禹範善), 교관에는 일본군 육군 소위 호리모토(掘本禮造)를 초빙하여 신식 교련을 시켰다.

별기군은 소부대로서 구식 군대를 완전히 대치할만한 대규모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부는 장차 별기군을 확대하여 구식 군대를 모두 신식 군대로 바꾸려고 하였다. 별기군은 임오군란에 이르러 구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로 한때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군대의 근대화는 초기 개화정책의 기본적 내용의 하나가 되었다.

개화기 과학기술 유학생의 파견

개항에 뒤따른 무비자강(武備自强)의 일환으로 김윤식·어윤중 등 개화파들이 중심이 되어 유학생을 파견해서, 중국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과학 기술 및 병기의 도입과 학습을 시도하였다.

개화파들은 젊은 국왕 고종을 움직여 중국으로부터 병기 학습을 위한 과학 기술 학도의 유학 파견을 종용하였다. 그래서 1879년 7월 조선측 이유원(李裕元)과 청나라측 이홍장(李鴻章)은 학도 파견에 대해 교섭을 벌여나갔다.

그 결과 1880년 4월 조정 대신들의 소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초기 개화파의 자문을 받은 고종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유학생 파견이 추진되었다.

우선 정부는 변원규(卞元圭)를 파견하여 청나라와 유학생 파견에 대한 장정(章程)을 체결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변원규가 4개조로 된 약관을 성공적으로 체결하고, 1880년 11월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학생 파견 준비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의 반발이 적지 않게 일어났다. 국내에서는 위정척사파 유생들이 “도리어 오랑캐를 불러들이는 매개가 된다”고 하며 강력한 반대 상소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신군제와 군사훈련은 일본의 것을 참작하여 실행할 것을 권유하며 이를 반대하였다. 청나라에서도 그들에게 부담이 되는 사업이라 여기도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자 1881년 이른 봄, 초기 개화파들은 청일 양국 사이에 중립형평책을 써서, 일본에 대해서는 이른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는 일본국정시찰단을, 청나라에 대해서는 공학도(工學徒)를 각각 파견하도록 하여, 두 이웃나라에 들어와 있는 근대 문물을 널리 받아들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신사유람단은 예정대로 일본으로 출발했으나, 청나라에의 ‘영선사(領選使)’라는 공식 명칭의 유학생사절단 파견은 처음 4월 11일로 출발 일자로 택정했다가, 다섯 차례나 날짜를 지연, 변경하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9월 26일에야 출발하게 되었다.

영선사 단원을 보면, 영선사에 김윤식, 종사관에 윤태준(尹泰駿), 별관당상에 변원규·이근배(李根培), 관변(官辯)에 백낙륜(白樂倫) 등을 비롯하여, 관원 12명, 수종(隨從) 19명, 학도 20명, 공장(工匠) 18명 등 모두 69명으로 구성되었다.

청나라에 도착한 유학생들은 톈진기기국(天津機器局)에 배속되었다. 톈진기기국에 파견된 학도와 공장들은 화약이나 탄약제조법만 학습한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자연과학 지식과 외국어도 습득하였다.

이것은 영선사 일행에 의한 유학생 파견이 좁은 의미의 병기 제조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의 신과학 기술 섭취를 위한 개화정책의 하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와 개화파들은 1882년 5월 통리기무아문 주사 어윤중과 이조연(李祖淵)을 문의관(問議官)으로 파견하여 유학생들을 격려하게 하였다.

이때 초기 개화파들은 낙오자들이 중도에서 다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아서 과학기술을 배워온 학도와 공장들을 중심으로 신병기창(新兵器廠)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근대적 병기를 제조하며 신과학기술을 도입, 발전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에의 유학생 파견은 도중에 중단되어, 1882년 10월 철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1882년 6월 9일 발발한 임오군란의 영향이었다. 6월 18일이 되서야 국내의 사정에 대해 본국의 정부가 붕괴되었다라고 소식을 전해 들은 유학생들은 매우 동요되었고 학습에 참여하지 않았다.

둘째, 학도와 공장 중에서 각종 사유로 귀국자가 많이 생긴 탓이었다. 1882년 5월초까지 38명의 유학생 중에서 19명이 여러 가지 사유로 탈락하였다. 이렇듯 탈락자가 많이 생기면서, 나머지 유학생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셋째, 재정의 빈곤이었다. 당시 정부는 영선사 일행을 톈진기기국에 파견해놓고도, 그들의 학습을 뒷받침해 줄 충분한 경비를 보내지 못하였다. 영선사 김윤식이 현지에서 청나라 상인들로부터 차관을 얻어 학도와 공장들의 경비를 조달한 일이 여러 번 있었을 정도였다.

넷째, 서울에 기기창(機器廠) 건설 계획이 수립된 사실이었다. 영선사 일행이 불리한 여건에 직면하고, 공학도들의 학습 기간이 장기화할 전망이 뚜렷해지자, 정부는 대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정부는 서울에 기기창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자연과학을 학습시키는 것이 경제적일 것이라는 판단하에 기기창 설립이 추진되고 공학도 귀환이 촉진되었다.

1882년 10월 28일 마침내 김윤식은 유학생들을 인솔하고 기기창 설립을 위한 다수의 기계들을 구입하여 1년 만에 톈진을 출발하여 11월 1일 인천에 도착함으로써, 청나라에의 공학도유학생 파견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영선사 일행의 파견은 그 뒤 우리 나라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첫째, 유학한 공학도들에 의해 처음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이 체계적으로 학습되어, 그 뒤 선진 과학 기술을 섭취하는 토대가 되었다.

둘째,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각종 근대기계와 과학기술서적이 대량으로 도입되어, 국내의 과학기술 지식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셋째,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병기공장인 기기창이 1883년 3월 서울 삼청동북창(北倉)에 건립되었다. 넷째, 구미제국에 대한 자주 개국의 실현이 촉진되었다. 영선사 김윤식은 톈진과 북경에 체류하면서 공학도의 감독과 함께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다변 외교와 통상을 청나라와 협의하여 추진하였던 것이다.

개화기 일본국정시찰단의 파견

정부는 청나라에 영선사 일행의 파견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본의 개화상태를 정확히 알고자 이른바 ‘신사유람단’의 파견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881년초 일본국정시찰단이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는 일본측의 권고나 주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조선측이 독자적으로 준비하여 일본측에 협조를 요청하여 이뤄졌다. 이를 주선한 것은 개화승인 이동인(李東仁)이었다. 이동인은 일본 히가시혼간사(東本願寺) 부산분원의 일본승과 통교하여 이를 준비했으므로, 시찰단이 구성될 때까지 주한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모르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둘러싸고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이 비등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열강의 압력과 함께 청나라와 일본이 다투어 조선에 자기의 영향력을 부식하려고 힘쓰고 있었다.

이러한 내외정세에 비추어 일본국정시찰단 파견은 극비리에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조정은 시찰 단원을 동래 암행어사로 발령하여, 비밀리에 동래에 모여서 일본으로 출발하도록 하였다.

시찰단의 구성을 보면, 전원을 12개반으로 편성하여 책임자는 조사(朝士) 12명으로 하고, 조사 1명에 대체로 수원(隨員) 2명, 통사(通事) 1명, 하인 1명씩을 배치하여 1개반을 5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총인원은 62명에 달하였다.

일본국정시찰단 일행은 1881년 1월 11일∼2월초에 걸쳐 개별적으로 서울을 출발, 3월 하순경에 동래에 도착하였다. 4월 10일 일본상선 안네이마루(安寧丸)를 타고 부산을 출발하여 4월 11일 나가사키(長崎), 4월 17일 오사카(大阪), 4월 20일 교토(京都), 4월 26일 고베(神戶), 4월 28일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4월 28일 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

일본에 더 남아 있다가 뒤에 청나라로 돌아온 어윤중·김용원의 2개반을 제외한 10개반은 7월 28일 고베를 출발하여, 윤7월 2일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만 3개월간 문물을 시찰, 조사하였다.

일본국정시찰단은 각 조사 사항에 대하여 자세한 시찰보고서를 작성하여, 각 문제들에 대해 자기들의 입장에서 평가를 내렸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부의 관제·세관·통상 등에 대해서는 완벽하리만큼 매우 정밀한 시찰 복명서를 고종에게 제출하였다.

일본국정시찰단의 파견은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둬었으며, 그 뒤의 개화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첫째, 근대적 제도개혁에 참조가 될 수 있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으며, 각 부문의 시찰보고서와 견문록은 조선의 제도개혁에 참고 자료로 사용되었다.

둘째, 시찰단에 참가했던 조사와 수원들이 모두 각 부문의 전문가가 되어 정부기구 안에서 중요한 직위를 차지하였다. 1881년 11월 통리기무아문이 개편될 당시, 육군과 군사를 각각 시찰한 홍영식과 이원회는 군무사 당상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내무성과 농상성을 시찰 조사한 박정양은 이용사당상에, 공부성을 시찰 조사한 강문형은 감공사 당상에, 외무성과 세관을 각각 시찰 조사한 민종묵과 이헌영은 통상사 당상에, 사법성을 시찰 조사한 엄세영은 율례사 당상에 각각 전문관료로 진출하였다.

셋째, 개화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영선사 일행과 일본국정시찰단 일행은 일부의 척족 세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개화자강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개화파에 가담함으로써 단기간에 초기 개화파의 세력이 증강되었다.

개화기 관세제도의 신설

정부는 일본과의 통상조약에서 기만당하여 무관세 무역을 인정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 뒤 정부는 해관(海關) 설치와 관세의 설정을 당면 개화정책의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개항 2년 뒤인 1878년 경상도 암행어사 이만식(李萬植)의 제의와 정부의 승인으로, 동래 부사 윤치화(尹致和)는 1878년 9월부터 부산두모진(豆毛鎭)에 수세소(收稅所)를 설치하였다. 그래서 수입상품에 대하여 수입세를 부과했으며, 우피(牛皮) 등 수출품에 대해서도 수출세를 부과하였다.

그런데 조선측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선 상인에게만 수세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이를 조약 위반이라고 트집잡아 무력시위와 협박을 하며 수세의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청나라의 이홍장까지 일본과의 충돌 회피를 권고해왔으므로 정부는 부득이 11월 26일 두모진 수세를 일단 정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뒤 조정은 1880년 5월 김홍집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관세의 설정, 인천개항의 연기 또는 변경, 식량 수출의 완화 등의 안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이 때, 김홍집은 수출입상품에 5%의 관세를 부과하는 관세세목초안을 일본측에 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이를 회피만 하고 전혀 협의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김홍집은 외교적 노력을 거듭하다가, 일본이 서양 각국과 30%의 관세율 인상을 교섭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그래서 조정은 다시 1881년 11월 조병호(趙秉鎬)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관세 설정을 교섭하도록 하였다.

조선측은 수입 상품을 6종으로 분류하여, 5∼35%의 관세 설정을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면세 대상을 넓히고, 10% 세율 품목에 해당하는 다수 품목을 5% 세율 품목으로 개정하자고 주장하며 협상에 임했다.

그런데 돌연 일본은 조병호가 수신사일 뿐 전권대사가 아니라고 트집을 잡으며, 협상을 파기하고 수출입세를 5%로 평준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조병호도 일본측과의 관세 설정에 대해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하고, 교섭을 중단한 채 귀국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측은 끝까지 관세 설정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초기 개화파들은 구미제국과 자주 개국을 하여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해관세칙(海關稅則)을 포함시킴으로써 관세를 설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해결 방법이 기울면서, 이홍장의 알선으로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체결이 추진되었다.

조선측은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의 노력과 일본 견제를 노린 이홍장의 지원으로 1882년 양력 5월 22일(음력 4월 4일) 조미수호조규(朝美修好條規)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제5관에 조선 조정이 주장하는 관세자주권(關稅自主權)과 10% 기준의 관세율을 명기하는데 성공하였다.

즉, 수입 관세는 일용품이 10%, 사치품은 30%로 정하고, 수출세를 5%로 정했으며, 선세(船稅)를 매톤에 5전으로 정하였다.

그 결과 문제의 일본에게 미국과 동률인 관세율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항을 우려한 일본측은 온갖 방해를 했으나, 결국 정부의 주장대로 관세율이 결정되었다. 이것은 일단 초기 개화정책의 성공한 업적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은 해관 설치가 급히 이뤄졌으므로 이홍장의 추천을 받은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f, P.G.V., 穆麟德)를 실무자로 고빙(顧聘)하였다. 그러나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발발하고, 그 뒤 청나라의 적극적인 간섭정책이 강화되면서 사태는 급변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협판에까지 승진한 묄렌도르프는 총세무사(總稅務司)의 직책을 겸임하여 해관을 창설하고, 이홍장의 지시에만 의거하면서 일본과 관세 설정 문제를 타결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묄렌도르프는 관세문제에 정력을 쏟았던 조선 개화파들의 자문을 받지 않고, 독단으로 일본측에게 유리한 통상장정과 해관세칙 초안을 작성하였다.

1883년 양력 7월 25일 묄렌도르프가 초안한 통상장정이 체결되었다. 일본 선박의 한국연안 취항을 인정했으며, 미곡수출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였다. 또한 금수(禁輸)를 원할 때에는 1개월 전에 통고하도록 하여 후일 방곡령사건(防穀令事件)의 소지를 만들었으며, 일본 관청과 관련된 상품과 선박에 대한 면세 특혜를 허용하였다.

또, 그가 초안한 해관세칙은 관세율을 5∼30%의 7종으로 분류하고, 대부분의 일본제 수입품에 대해서는 최저율인 5%를 적용하게 하였으며, 수입품의 대종인 면직물에 대해서는 8%의 저율을 적용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세칙은 일본제 상품의 대부분에 5%의 저율 수입세를 규정한 이기 때문에, 일본측이 주장하던 5% 기준 관세율에 비하면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저율 관세제였다. 뿐만 아니라 금은의 수출을 면세로 정하는 커다란 허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묄렌도르프의 무책임한 양보에 의하여 일본이 저관세율을 획득하자, 당시 조선에서 수입하던 면직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독일과 연합하여 면직물 수입 관세에 대해서도 일본 상품과 마찬가지로 5%의 관세율을 적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측은 처음에는 강력히 반대했으나, 결국 굴복하여 대체로 영국이 주장하는 관세율에 따라 조영수호조규(朝英修好條規)와 조독수호조규(朝獨修好條規)를 개정하였다. 그런데 개정된 조영수호조규에서 결정된 관세율은 그 뒤 각국에 적용되었다.

조약에 의하면, 수입 관세를 5%·7%·10%·20%의 4종류로 나누두록 하여 상한을 종래의 30%에서 20%로 대폭 내렸으며, 직물 중에서 면사와 모사(毛絲)에 대해서는 5%, 직포에 대해서는 7%의 세율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그밖에는 대체로 조일해관세칙에 준하였다.

1883년 11월 해관이 설치되어 수세 사무가 시작되었다. 기구를 보면, 부산·원산·인천에 감리서(監理署)가 설치되었고 정부는 감리를 임명했다. 한편 총세무사 묄렌도르프 밑에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세무사를 두는 이원 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청나라가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펴고 있을 때이며, 실권이 총세무사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관의 실제 사무는 조선인 감리에 의해 관리된 것이 아니고 외국인 세무사에 의해서 관리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그 뒤 시정되지 못하고 해관은 내내 외국인의 관장하에 놓이게 되었다. 관세의 설정과 해관의 설치 과정이 초기 개화정책에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진전되었는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개화기 근대학교의 설립

개항 이후 선각자들은 열강의 도전에 대처하여 나라의 독립과 발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지식을 갖춘 강건한 인재를 교육, 양성해야 한다고 하여, 교육을 가장 급무라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근대학교의 설립을 매우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였다. 즉, 그들은 근대학교의 설립이 자주적 근대화를 달성하는 동력기관의 창설이라고 생각하고,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1878년 개항장인 동래에 무예교육을 위한 제도를 창설하였다. 1883년 이른봄부터 여름에 걸쳐 개항장인 원산에서는 민간인들이 개화파 관료들의 지원을 얻어 원산학사(元山學舍)를 설립하였다.

그 뒤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鄭顯奭)은 민간인들의 요청과 출재에 의해 학교가 설립됐다고, 1883년 8월 28일 정부에 보고하여 정부의 승인까지 얻어 냈다. 이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이자 최초의 민립학교가 되었다.

원산학사 설립의 출재 비율을 보면, 총설립 기금의 88.8%를 지방민과 개화파 관료가 출재했고, 11.2%를 원산감리서에 고용된 외국인 세무사들이 출재했다.

출재를 민간인과 관료로 나누어보면 민간인이 95.0%, 관료가 5.0%를 출재하였다. 원산학사가 민·관합작으로 설립되었지만, 주로 민간인들에 의해 이뤄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학급은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편성되었으며, 문예반은 지방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제를 약 50명 입학시키고, 타읍인이라도 수업료를 내면 입학을 허가하였다. 무예반은 정원을 200명으로 하여 무사를 입학시켰으며, 다른 지방의 무사도 입학을 희망하는 자는 모두 허가하도록 하였다.

원산학사가 문예반과 함께 특히 무예반을 병설한 것은 일본의 무력도발이 개항장에서 자주 자행되는 사태와 관련하여 무비자강을 실현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에 대응하기 위한 창의적인 것이었다.

교과 과목은 특수 과목으로서 문예반은 경의(經義)를, 무예반은 병서(兵書)와 사격술을, 문무 공통과목으로는 산수·물리로부터 각종의 기계기술·농업·양잠·광채(礦採) 등을 가르쳤다. 그 밖에 일본어 등 외국어와 만국공법(국제공법), 그리고 각국 지리도 교수하였다.

원산학사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재력을 모아서 개항장에 밀려오는 외세에 대항하고 실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립학교라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그리고 원산학사와 같은 일반학교는 아니지만 같은 해인 1883년 통역관 양성을 위해 통리기무아문 부속의 동문학(同文學)이라는 영어학교가 있었다. 동문학은 연소하고 총민한 어학생 약 40명을 뽑아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영어·일본어·서양산술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학생 중에서 우수한 자는 학용품과 기숙비를 통리기무아문에서 공급하여주었다. 동문학은 1883년 8월 영국인 핼리팩스(Hallifax, T.E., 奚來百士)를 초빙하여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설립되면서 발전적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므로 동문학은 우리 나라 최초의 관립학교인 셈이다.

개화기 근대신문의 발간

초기 개화파들은 1880년대에 들어서자 근대신문의 발간을 추진해 오다가, 1883년 양력 10월 30일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를 발간하게 되었다.

신문 발간을 추진한 개화 인사는 박영효(朴泳孝)로, 그는 1880년부터 신문 발행을 주장해 오다가 한성 판윤이 되자 국왕의 허가를 얻어 유길준(兪吉濬)을 등용시켜, 본격적으로 신문 발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박영효가 수구파의 미움을 받아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되면서 신문 발간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런데 박영효의 신문 발간 계획은 개화 인사 김윤식에게 인계되었다. 김윤식은 동문학 장교(掌交)인 김만식(金晩植)에게 신문 발간 사업을 위임하였다.

김만식은 신문 발간의 담당 부서로 박문국(博文局)을 신설하고, 편집 주사로 김인식(金寅植)을 선발하였다. 그리고 조선인 편집 부원 3명과 일본인 이노우에(井上角五郎)를 번역 부원으로 고용하여 편집 진용을 갖추었다.

이 무렵 인쇄 기계와 신문 용지로 쓸 개량지도 구입되어, 양력 10월 30일 역사적인 ≪한성순보≫ 창간호가 나오게 되었다. ≪한성순보≫는 세로 25㎝, 가로 19㎝ 크기의 8면에 달하는 규모로 오늘날의 주간지 비슷한 것이었다.

내용은 순한문으로 표기하고, 창간호에서는 창간사에 해당하는 ‘순보서(旬報序)’, 정부소식의 ‘내국기사(內國記事)’, 외국소식의 ‘각국근사(各國近事)’, 교양을 위한 특별 해설로 지구에 대한 여러 가지 과학적 설명을 수록하였다.

대체로 매호마다 내국기사, 각국근사, 교양을 위한 해설기사 등이 ≪한성순보≫의 주요 내용을 이루었다. ≪한성순보≫는 이름 그대로 10일마다 빠짐없이 발행되다가, 1884년 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인해 박문국이 파괴되어 신문 간행이 중단될 때까지 40호 이상 발간되었다.

≪한성순보≫ 폐간 뒤 신문이 없어 큰 불편을 겪게 되자 김윤식이 복간을 서둘렀다. 그는 인쇄기를 다시 구입하고 편집 부원도 11명으로 늘려서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 漢城周報≫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한성주보≫는 ≪한성순보≫를 계승하여 비슷한 체재를 갖춘 것이었으나, 발간 횟수를 주 1회로 늘렸으며, 신문 기사를 국한문혼용으로 작성하여 보다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성주보≫는 1888년 양력 7월 7일까지 100호 이상을 내고 운영난으로 정간되었다.

개화기 근대적 산업시설의 대두

초기 개화파들은 근대적 산업시설을 만드는 것을 부국 강병의 중요한 기초라고 생각하고, 산업개발과 근대적 상공업 기업체 설립에 주력하였다.

그러한 개화정책의 영향으로 1880년대에 들어서, 서울과 전국 각 지방에서 각종 근대적 회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다.

그 밖에 전통적 상업 자본으로 개항 이후 대성장한 서울의 시전상인(市廛商人), 전국 각 지방의 객주(客主)·보부상(褓負商) 등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런데 일부는 근대적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몰락했지만, 대부분은 1884년까지도 계속 성장하여 객주상회사(客主商會社) 또는 상무사(商務社)로서 근대적 형태로 변모해 갔다.

농업부문에서도 개화정책이 실현되어 1884년 잠상공사(蠶桑公司)가 설치되고, 근대적인 양잠법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외국의 농법과 양잠법을 소개하고 보급할 목적으로 1881년 안종수(安宗洙)의 ≪농정신편 農政新編≫, 1884년 이우규(李祐珪)의 ≪잠상촬요 蠶桑撮要≫ 등의 각종 새로운 농서(農書)가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884년의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의 설립은 이 시기의 주목할만한 개화사업이었다. 농무목축시험장은 우리 나라 최초의 미국 파견 사절단인 보빙사 일행이 귀국한 뒤, 사절단의 수행원이었던 최경석(崔景錫)이 관리관이 되어 설치한 농업시험장이었다.

보빙사 일행은 미국 방문 도중 홍영식이 중심이 되어, 농업시험장설치의 희망을 표시하고 협조를 약속받은 다음 귀국하여, 국왕의 허가를 얻어 동대문 밖에 농업시험장을 설치한 것이다.

농업시험장에는 각종 농작물과 야채 및 과수를 재배하고, 최경석이 미국에서 가져온 신품종을 중심으로 시험재배를 하여 성공을 거뒀다. 최경석은 농업시험장 설치 첫 해에 이미 대성공을 거두어 거기서 수확한 개량신품종의 재배법을 설명하는 해설서를 첨부, 각 지방에 송부하여 개량종을 재배하도록 권장했다.

최경석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목축의 도입과 가축의 개량도 시도했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젖소·황소·말·돼지·양 등의 가축을 도입했으며, 농업시험장에서 가축의 품종개량과 사육방법의 개선, 버터와 치즈 등 낙농제품의 생산까지도 계획했다. 그러나 농업시험장은 1885년까지 대성공을 거두다가 1886년 최경석이 죽음으로써 큰 시련에 부닥쳤다.

또한, 기선해운 부문에서도 1884년에 기선회사(汽船會社)가 설립되어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기선회사는 통리기무아문의 전운국(轉運局)에서 미국 상인의 중개를 통하여 기선 3척을 도입하여 설립되었다. 그래서 연해의 화물운송과 조곡(租穀)의 운송, 군대와 그밖의 관용화물 운송에 종사하였다.

이 밖에 초기 개화정책에서 특기한 것은 김옥균 등에 의해 이뤄진 해외 유학생 파견, 박영효가 한성판윤으로 있을 당시 치도국(治道局) 설립과 서울시내의 도로 정비, 홍영식의 우정국 설립, 근대적 우편제도의 창설, 그리고 초기 개화파들이 추진한 복식제도의 간소화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국내의 위정척사파로부터의 반발과 국외로부터의 열강의 압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880년대에 들어오면서 개화정책은 빠르게 진전되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내세우며, 개화정책에 대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정책이라며 간섭하고 탄압을 가해 왔다. 갑신정변 이후 급진개화파가 몰락하고 온건개화파만 남게 되면서 청나라의 압력을 받으며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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