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천 출신. 1904년 2월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에 1905년 1월 강원형(姜遠馨) 등과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각국 공사관에도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폭로, 규탄하는 공개장을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에는 대한십삼도유약소의 동지들과 함께 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규탄하는 운동을 벌였다.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자, 동지들과 연명으로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려 을사조약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이완용(李完用)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가 발각되어 10년유배형에 처해졌다.
1909년에는 이상설(李相卨)이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할 국내대표로 김진구(金鎭九)와 함께 선정하여 이들에게 극비리에 여비를 보내어 상해에 나오도록 하였으나 일제의 연금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