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기무처는 조선 말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이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친일파 정권이 수립되자 제도개혁과 신정권 탄생에 따른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합의체 형식으로 구성된 초정부적 입법·정책결정기구로서 최고집권자의 회의체 기능을 수행했다. 7월 28일부터 10월 29일까지 약 3개월 동안 실질적인 활동을 하며 210건의 의안을 심의·통과시켰다. 내부 갈등이 있었던 데다 일본의 대한정책이 적극개입 정책으로 바뀌고 고종도 전제왕권을 제약하는 기구로 인식하면서 12월 17일 칙령으로 폐지되었다.
1894년(고종 31) 6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하였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다음 흥선대원군을 추대한 친일파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에 이전부터 논의되어 오던 제도 개혁을 실시하고 새로운 정권의 탄생에 따른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합의체의 형식으로 구성된 초정부적(超政府的)인 입법 · 정책결정기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기구는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杉村濬)가 발의하고 대원군과 친일파 개혁 관료들이 동의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1882∼1883년간에 존속하였던 기무처(機務處)의 이름을 따서 대원군이 명명한 것이다.
발족 당시 군국기무처는 총재 1명, 부총재 1명, 그리고 16명 내지 20명 미만의 회의원(會議員)으로 구성되었다. 이밖에 군국기무처에는 2명 정도의 서기관이 있어서 활동을 도왔고, 또 회의원 중 3명이 기초 위원으로 선정되어 의안의 작성을 책임진 것 같다. 총재는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이 겸임하고, 부총재는 내아문(內衙門) 독판(督辦)으로 회의원인 박정양(朴定陽)이 겸임하였다.
이들 이외에 7월 27일 회의원으로 임명된 개혁 관료는 내아문 협판(協辦) 민영달(閔泳達) · 김종한(金宗漢), 외아문(外衙門) 협판 김가진(金嘉鎭), 강화부 유수 김윤식(金允植), 장위사(壯衛使) 조희연(趙羲淵), 대호군(大護軍) 이윤용(李允用), 우포도대장 안경수(安駉壽), 내아문 참의(參議) 정경원(鄭敬源) · 박준양(朴濬陽) · 이원긍(李源兢) · 김학우(金鶴羽) · 권영진(權濚鎭), 외아문 참의 유길준(兪吉濬) · 김하영(金夏榮), 공조 참의 이응익(李應翼), 부호군(副護軍) 서상집(徐相集) 등이었다.
그리고 8월 2일 선혜청(宣惠廳) 당상(堂上) 어윤중(魚允中), 이조 참의 이태용(李泰容), 내아문 참의 권재형(權在衡) 등이 회의원으로 추가 임명되었다. 또 9월 21일에는 공무아문 협판 이도재(李道宰), 탁지아문 협판 신기선(申箕善), 장위영(壯衛營) 영관(領官) 우범선(禹範善) 등이 회의원으로 추가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회의원이었던 이태용 · 이원긍 · 김하영은 병고(病故) 혹은 외직근무 등의 이유로 면직되었다. 군국기무처의 서기관직은 유정수(柳定秀) · 오세창(吳世昌) 등이 맡았으며, 김가진 · 안경수 · 유길준이 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던 것 같다.
8월 22일 군국기무처의 결의로, 8월 20일에 새로 임명된 각 아문 대신, 각 영 대장 · 경무사(警務使)는 회의원을 겸하게 되어, 군국기무처는 신정부 내의 최고집권자의 회의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군국기무처는 6월 25일에서 12월 17일까지 존속하였으나, 실제로 활동한 것은 7월 28일부터 10월 29일까지 약 3개월 동안이었다.
이 기간 중에 군국기무처는 40회의 회의를 거쳐 189개의 개혁 안건을 포함한 도합 약 210건의 의안을 심의 · 통과시켰다. 특히 중앙정부구조를 크게 의정부와 궁내부(宮內府)의 두 부로 나누어 권력의 중심을 의정부(뒤에 내각으로 개칭)로 옮기고, 국왕의 전제권을 제약한 제도개혁은 군국기무처 회의원 자신들의 권력확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군국기무처가 심의 · 통과시킨 의안은 국왕의 재가를 거쳐 국법으로 시행되었다.
주요 개혁의 내용은, 앞에서 지적한 중앙권력기구의 재조직을 비롯하여, 청나라에 대한 독립의 천명, 과거제도의 폐지와 새로운 관리 임용법의 채택, 양반 · 상인 등 계급의 타파, 연좌율(緣坐律)의 폐지, 조혼의 금지, 공사 노비의 해방, 과부의 재가 허용, 재정제도의 일원화 등으로, 조선왕조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려고 하였다.
군국기무처가 통과시킨 개혁안 중에는, 1880년대 이래 개화운동에서 강조된 개혁안과 동학운동에서 지적된 개혁조건 및 일본정부가 기대한 개혁요건 등이 반영되었다. 군국기무처가 추진한 이때의 개혁을 보통 ‘갑오경장’이라고 부른다. 군국기무처는 청일전쟁이 정식으로 선포되는 8월 1일 이전에 발족하여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최초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9월 중순의 평양전투 때까지 활발히 기능을 발휘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일본정부는 조선의 친일정권에 대해 회유정책을 쓰고 있어 군국기무처에 대하여서는 되도록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군국기무처가 통과시킨 여러 가지 개혁 안건은 조선왕조의 개혁 관료들이 『대전회통』 · 『육전조례』 등 구법전과 일본의 신식 법전을 참조하여 자율적으로 기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안 과정에서 특히 유길준 · 김학우 · 김가진 · 안경수 등이 많은 활약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국기무처는 대원군파(이태용 · 이원긍 · 박준양 등)와 반대파(김학우 · 이윤용 · 안경수 등) 사이의 갈등과 분쟁으로 기능이 점차 약화되었다. 그 뒤 10월 이후에 일본의 대한정책이 적극 개입정책으로 바뀌면서 결국 폐지되었다. 일본 정부가 새로 임명한 주한공사 이노우에(井上馨)는 군국기무처를 자기가 추진하고자 하는 개혁운동의 방해물로 간주하고, 11월 20일 국왕에게 요구한 20개조의 개혁 요구 조건에 군국기무처의 폐지를 포함시킨 것이다. 고종도 전제왕권을 제약한 군국기무처의 존재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있던 터였으므로, 12월 17일 칙령에 의해 폐지시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