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제도는 중국 당 · 송의 옛 제도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황제 부재시에 유수를 두어 수도를 지키게 하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옛 도읍지에 유수부를 두어 행정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고려시대는 당 · 송의 제도 가운데 후자의 제도를 도입해 옛 왕경인 삼경(三京)에다 유수부를 설치하고 유수관을 두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위의 삼경제도를 벗어나 수도 방위를 위한 행정적 · 군사적 중요 지역에 유수부를 두어 유수를 파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95년(성종 14)에 수도인 개경(開京)을 개경부라 하고 당나라 제도를 모방해 적현(赤縣)과 기현(畿縣)을 두었다. 그리고 옛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를 동경(東京), 고구려의 옛 도읍지인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하여 각각 유수부를 설치하고 유수에 대한 삼경제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문종 대에 이르러 옛 백제의 도읍지인 서울(당시 楊州)에 남경을 설치하고 유수부를 두어 개경을 제외한 동경 · 서경 · 남경을 삼경으로 하여 유수를 두었다. 유수는 3품 이상관으로 유수사(留守事, 서경) · 유수사(留守使) · 유수관(留守官) 등으로 불렸으며 모두 외관직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수를 처음 둔 곳은 조선 태조의 어향(御鄕)인 전주와 고려의 옛 도읍지인 개성이었다. 초기에는 유수를 유후(留後)라고 했으며 관아를 유후사(留後司)라 하였다. 전주의 경우 그 상세한 것을 알 수 없으나, 개성유후사는 보다 조직적 ·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는 태조가 개국한 기명지(基命地)일 뿐만 아니라, 고려의 옛 도읍지인 동시에 중국 사행(使行)의 유숙지로 크게 활용되어 더욱 중시되었다.
개성유후는 정2품직으로 한성부와 마찬가지로 경관(京官)을 임명하였다. 개성유후사는 1438년(세종 20) 10월에 개성부로 개칭되고 유후도 유수로 개칭되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2인의 유수를 두되 1인은 경기관찰사가 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행정은 전임(專任) 유수가 담당하고 군사 업무도 주관하였다.
유수제는 조선 후기부터 더욱 확대되었다. 즉,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환도 뒤 이곳에 유수를 두었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수어청(守禦廳) 체제를 강화하면서 유수를 두었다.
그리고 1793년(정조 17)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도성(都城) 중심의 내영(內營)과 화성(華城 : 水原) 중심의 외영을 설치하면서 이곳에도 유수를 두게 되었다.
이상에서 조선 초기에는 국왕의 행궁터 등에 유수를 파견했으나 조선 후기에 가서는 유수부가 수도의 외곽을 방어하는 배도(陪都)로서의 기능이 더욱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수원유수는 총리영(摠理營)의 사(使)를 겸했으며, 광주유수(廣州留守)는 몇 차례의 변동이 있은 뒤에 남한산성의 수어청사(守禦廳使)를 겸하였다.
또 개성유수는 관리영사(管理營使)를 겸하고 강화유수는 진무영사(鎭撫營使)를 맡아 수도의 외곽 방어에 책임을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