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한성부(漢城府)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392년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개경(開京)에서 한양부(漢陽府)로 수도를 옮기고 그 다음해인 1395년 한양부를 한성부라고 이름을 고쳤다.
한성부는 1910년 경성부(京城府)로 이름이 바뀔 때까지 515년간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부분의 중심지였다.
한반도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한성은 북쪽에는 백악산(白岳山), 남쪽에는 목멱산(木覓山), 동쪽에는 낙타산(駱駝山), 서쪽에는 인왕산(仁王山) 등의 내사산(內四山)과 저 멀리 북쪽에는 북한산(北漢山), 남쪽에는 관악산(冠岳山), 동쪽에는 수락산(水洛山), 서쪽에는 덕양산(德陽山)의 외사산(外四山)으로 겹겹이 둘러 싸여 있다.
또한 금강산(金剛山)에서 발원하는 북한강(北漢江)과 오대산(五臺山)에서 발원하는 남한강(南漢江)이 유유히 흐르면서 한강을 이루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간다. 한성부는 국토의 중앙지요, 천연의 요새지일 뿐만 아니라 수륙(水陸)교통이 편리하여 한 국가의 수도가 갖추어야 할 자연적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한편 1394년 11월 29일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한 이성계는 백악산(白岳山)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국왕이 거주하며 국가를 통치할 궁궐을 건설하고 궁궐 왼쪽에 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宗廟), 오른쪽에는 토지신(土地神)과 곡신(穀神)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을 건설하였다.
종묘 동북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모시는 문묘(文廟)와 학생들을 교육하는 성균관을 건설하였고, 궁궐 앞에는 의정부를 비롯하여 이조 · 호조 · 예조 · 형조 · 병조 · 공조 등 육조와 한성부 및 그 밖의 각 관서를 좌우로 건설하였다.
이어 백악산 · 인왕산 · 목멱산 · 낙타산을 연결하는 높이 약 8.5m, 둘레 59,500척(약 18㎞)의 도성(都城)을 건설하고 흥인지문(興仁之門) · 돈의문(敦義門) · 숭례문(崇禮門) · 숙청문(肅淸門: 뒤에 肅靜門으로 고침) 4개의 대문(大門)과 혜화문(惠化門) · 소의문(昭義門) · 동소문(東小門) · 창의문(彰義門) 4개의 소문(小門)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세종로 1번지를 기점으로 동 · 서 · 남 · 북으로 대로(大路)를 내고 도로의 좌 · 우 · 전 · 후에는 민가를 건설하였으며 5부(五部) 52방(坊)의 행정구역을 설정하였다.
수도의 면모를 갖춘 한성부에는 치안을 유지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종로 네거리에 종각(鐘閣)을 짓고 종을 달아 아침 4시 경에 파루(罷漏:33번 종을 침)를 쳐서 4대문과 4소문을 활짝 열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통행하게 하고 저녁 10시 경에 인정(人定:28번 종을 침)을 쳐서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한성부의 관할구역은 도성에서부터 10리까지로 하였다. 관할구역의 한계를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는 없으나 대체로 동쪽으로는 오늘날 우의동 · 번동 · 장위동 · 석관동 · 이문동 · 전농동 등으로 연결지어진 곳으로 하였다.
남쪽으로는 중랑천에서 흐르는 물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한강을 경계선으로 하였으며, 서북쪽으로는 망원동 · 남가좌동 · 역촌동 · 대조동 · 북한산 비봉(碑峰)으로 연결되는 선으로 하였으며, 북쪽으로는 비봉에서 북한산 동쪽 능선으로 하였다.
한성부 관할구역 내에는 조선 전기인 1428년(세종 10)경에는 109,372명(도성안 103,328, 도성밖 6,044)의 부민이 거주하였고, 조선 후기인 1780년(정조 4) 경에는 38,742호에 201,070명의 부민이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350여 년 만에 인구는 거의 배가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성부민을 관할하였던 한성부 관아의 규모는 172간이었고, 정규직 관원으로는 정2품의 한성판윤을 비롯하여 종2품의 윤(尹) 2인, 정4품의 소윤(小尹) 2인, 종5품의 판관(判官) 2인, 정7품의 참군(參軍) 2인 등 모두 9인의 관원이 있었다.
1469년(예종 1)에는 종2품의 윤을 좌윤(左尹)과 우윤(右尹)으로 분리하는 한편, 소윤 2인은 없애고 종4품의 서윤(庶尹) 1인을 새로 두고 참군 2인을 3인으로 증가시켰다. 따라서 한성부 관아 총관원수 9인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1686년(숙종 12)에는 참군 1인을 감원하여 2인이 되었고, 1725년(영조 원년)에는 주부(主簿) 1명을 새로 배치하는 대신 참군을 1명으로 감원하였다가 1764년(영조 40)에는 참군을 모두 없애고 주부가 1인 증가하여 2인으로 되었다.
1395년부터 1686년까지 한성부 관원은 모두 9인이었고 1686년에서 1887년까지 200년 간 한성부 관원수는 모두 8인이었으나 1887년(고종 24)에 서윤을 폐지함으로써 한성부 관원은 7인이 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조선왕조의 모든 관제가 개편되고 관리의 명칭이 변경되면서 한성부의 최고책임자인 판윤은 부윤(府尹)이라고 하였다가 다음해인 1895년에는 관찰사(觀察使)라고 하였다.
이후 윤(尹) · 부윤 등으로 불리어졌고 하급관원의 명칭도 주사(主事) · 참서관(參書官) · 사무관(事務官) · 기수(技手) 등의 명칭으로 불리어졌다.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되기 직전의 한성부의 관원은 부윤 1인, 사무관(事務官) 2인, 주사(主事) 15인, 기수(技手) 10인 등 모두 33인이었다. 그리고 한성부 관아에는 정규직 관원 이외에 이속(吏屬)들이 있었다.
서리(書吏) 41인, 호적서원(戶籍書員) 11인, 서사(書寫) 1인, 소차서리(疏箚書吏) 3인, 대령서리(待令書吏) 1인, 고직(庫直) 1인 등 58인의 이서(吏胥)와 사령(使令) 47명, 구종(驅從) 14명, 군사 7명 등 68명의 도예(徒隷)가 있었다.
따라서 한성부 관아에는 대체로 판윤을 비롯한 정규직 관원 7∼9인과 이서 58인, 도예 68명 등 모두 130여 명이 있었다. 한성부 관아의 하부직제로는 육방제도(六房制度)가 있어 각기 담당 업무를 관할하였다.
이방(吏房)은 주로 관원의 인사업무, 호방(戶房)은 가사업무(家舍業務)와 호적업무 · 재정업무, 예방(禮房)은 주로 간택과 산송업무, 형방(刑房)은 주로 시신(屍身)의 검안업무(檢案業務)와 여가(閭家) 침입 금지업무, 병방(兵房)은 궁성(宮城)과 도성을 순찰하는 좌경(坐更)업무와 금화(禁火:소방)업무, 공방(工房)은 도로관리와 보수, 개천과 교량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성부의 관할구역은 크게 중부(中部) · 동부(東部) · 서부(西部) · 남부(南部) · 북부(北部)의 5부(五部)로 나누고 다시 동부는 연희방(燕禧坊) · 숭교방(崇敎坊) · 천달방(泉達坊) · 창선방(彰善坊) · 건덕방(建德坊) · 성덕방(聖德坊) · 서운방(瑞雲坊) · 연화방(蓮花坊) · 숭신방(崇信坊) · 인창방(仁昌坊) · 관덕방(觀德坊) · 흥성방(興盛坊) 등 12방이 있었다.
서부는 영견방(永堅坊) · 인달방(仁達坊) · 적선방(積善坊) · 여경방(餘慶坊) · 인지방(仁智坊) · 황화방(皇華坊) · 취현방(聚賢坊) · 양생방(養生坊) · 신화방(神化坊) · 반석방(盤石坊) · 반송방(盤松坊) 등 11방이 있었다.
남부는 광통방(廣通坊) · 호현방(好賢坊) · 명례방(明禮坊) · 대평방(大平坊) · 훈도방(薰陶坊) · 성명방(誠明坊) · 낙선방(樂善坊) · 정심방(貞心坊) · 명철방(明哲坊) · 성신방(誠身坊) · 예성방(禮成坊) 등 11방이 있다.
북부는 광화방(廣化坊) · 양덕방(陽德坊) · 가회방(嘉會坊) · 안국방(安國坊) · 관광방(觀光坊) · 징청방(澄淸坊) · 순화방(順化坊) · 명통방(明通坊) · 준수방(俊秀坊) · 의통방(義通坊) 등 10방이 있다.
중부는 정선방(貞善坊) · 경행방(慶幸坊) · 관인방(寬仁坊) · 수진방(壽進坊) · 진정방(鎭定방) · 장통방(長通坊) · 서린방(瑞麟坊) · 견평방(堅平坊) 등 8방으로 모두 52개의 방으로 나누어서 관할하였다.
5부장으로 관령(官領)이 있고 대장(隊長) · 대부(隊副) · 체아(遆兒) 등의 이속(吏屬)이 있어 업무를 처리하였고 방에는 방장(坊長)이 있어 업무를 처리하였다.
사법권과 행정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한성부 치안은 특별한 기관에서만 담당하였던 것이 아니고, 여러 기관에서 담당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순군만호부를 비롯하여 한성부 · 의금부 등에서 담당하였고 포도청이 설치된 이후에는 포도청과 아울러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다.
포도청은 좌포도청(左捕盜廳)과 우포도청(右捕盜廳)을 설치하였다. 좌포도청은 세종로(현 동아일보 자리)에 설치하였고, 우포도청은 종로 3가(현재 단성사 자리)에 설치하였다.
포도청에는 포도대장을 비롯하여 포도군관 · 부장 · 군사 등 좌포도청 111인, 우포도청 111인 모두 222인의 인원이 있어 한성부 치안을 담당하였고 조선 말기 고종대에는 좌 · 우포도청의 인원이 286인이나 증가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좌포도청이 한성부의 동부 · 남부 · 중부와 경기좌도 일원의 치안을 담당하였고, 우포도청에서는 한성부 서부 · 북부와 그리고 경기우도 일원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경기도 일원은 제외되고 한성부 관할구역의 치안만을 담당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훈련도감(訓鍊都監) · 금위영(禁衛營) · 어영청(禦營廳)의 3군문(三軍門)이 한성부 치안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3군문은 원래 도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도성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서 도성경비를 하였으나 뒤에 한성부 내 치안도 담당하였다. 각 군문에서는 주로 밤에 순찰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초관(哨官:장교) 한 사람이 대체로 2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찰하면서 주로 금도(禁盜: 도적을 미리 예방함) · 금화(禁火)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한성부 치안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경수소(警守所)가 있었다. 경수소에서는 보병 2명이 부근 방리인(坊里人) 5명을 거느리고 궁(弓) · 검(劍) · 장(杖)을 휴대하고 숙직하였다. 이는 군과 민이 합동으로 치안을 담당하였던 것으로서 한성부 내에는 100여 개가 있었다.
한성부 52방 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다. 세종 때에는 서부의 영견방 · 인지방 · 취현방의 3개 방이 폐지되어 49개 방으로 되었다.
1751년(영조 27)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 都城三軍門分界總錄>에는 동부 12개 방에서 6개 방(연희방 · 천달방 · 덕성방 · 서운방 · 관덕방 · 흥성방)이 폐지되었고, 남부에는 3개 방(성신방 · 정심방 · 예성방)이 폐지되고 새로 3개 방(한강방 · 둔지방 · 두모방)이 신설되었으며, 서부에는 1개 방(신화방)을 폐지하고 2개 방(용산방 · 서강방)을 신설하여 8개 방에서 9개 방이 되었다.
북부에는 명통방을 폐지하여 9개 방에서 8개 방이 되었다. 따라서 영조 때 한성부 5부의 방은 동부 6개 방, 남부 11개 방, 서부 9개 방, 북부 9개 방, 중부 8개 방 등 모두 43개 방이 되었다.
1867년(고종 4)에 간행된 ≪육전조례 六典條例≫에는 동부에 경모궁방이 신설되고 북부에 상평방 · 연은방 · 연희방이 신설되어 4개 방이 증가되었고, 방 밑에는 340개의 계(契)가 설치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할 때 한성부 5부(五部)를 5서(五署)로 개칭하였고, 계를 288개로 줄이고 775개의 동(洞)을 설치하여 한성부는 5서 288계 775동으로 하였다.
1895년 지방행정 개혁에 따라 8도(道)제도를 폐지하고 23부(府) 337군(郡) 제도를 시행하면서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부를 한성군(漢城郡)으로 격하하고 한성부는 양주군 · 광주군 · 적성군 · 포천군 · 영평군 · 가평군 · 연천군 · 고양군 · 파주군 · 교하군의 11개 군을 관할하게 하였다.
따라서 종래의 한성부의 기능은 한성군이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1896년에는 23부 제도를 폐지하고 조선 13도 제도를 시행함에 따라서 1개 군으로 격하되었던 한성부는 조선왕조의 수도로서의 위치를 회복하였으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수도 한성부도 경성부로 개칭되었다.